[작가를 만나다]


"저예산 영화에는 그에 맞는 제작 방식이 있어야 한다”

- <러시안 소설> 신연식 감독과의 대화




지난 10월 12일, “작가를 만나다”의 주인공으로  <페어 러브> 이후 오랜만에 신작을 발표한 신연식 감독을 초대했다. 적은 예산과 적은 수의 스태프, 그리고 신인 배우들을 기용해 만든 <러시안 소설>은 여러 개의 층위를 가진 스토리텔링과 2부로 나눈 구성 등 독특한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미 다음 영화인 <배우는 배우다>를 완성했으며 그 다음 영화까지 구상하고 있는 신연식 감독은 차분한 목소리로 <러시안 소설>에 대한 이야기와 연출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까지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 중 일부를 옮긴다.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영화가 몽롱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러시안 소설>이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는지 궁금하다.


신연식(영화감독)│처음 시작은 중년 멜로 3부작 중 하나였다. 무명 소설가가 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고, 잠들기 전에 만난 여자와 깨어나 유명해진 후 만나는 여자가 다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연기 레슨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중년 멜로였던 것이 내가 레슨하던 친구들을 섭외하면서 자연스럽게 젊은 친구들이 등장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김보년│러닝타임이 140분으로 긴 편이지만 밀도가 있어서 더 짧게 줄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처음부터 이 정도 상영 시간을 예상한 건가. 그리고 전반부와 후반부의 영화적 느낌도 다르다.


신연식│러닝타임은 100% 예상한 대로 나왔다. 원래는 전반부와 후반부를 따로 나누어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전반부가 없으면 후반부를 설명하기 어려워서 지금처럼 만들었다. 독립영화의 경우 제작과정에서 러닝타임이 길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는 전반부 90분, 후반부 50분이라는 목표 그대로 만들었다. 이번 영화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구조적 특성은 어디서부터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실제의 삶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후반부 전체가 죽기 전에 남겨둔 소설일 수도 있다. 그렇기 떄문에 처음부터 전반부와 후반부에 이질감을 주려고 노력했다.


김보년│신인배우들도 많고, 전반부와 후반부의 영화 톤이 달라지는 등 연기 지도에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을 것 같다.


신연식│많은 사람들이 내가 연기를 타이트하게 지도한다고 많이 오해한다. 그런데 나는 현장에서 연기지도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특히 이번에는 경험이 많은 배우들이 아니라 많은 요구를 하기 어려웠다. 좋은 연기를 끌어내려면 촬영 전부터 연기자들의 전력을 파악해야 한다. 배우가 자라온 환경과 쌓아온 경력이 다르기에 연기톤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에게 일을 맞추는 편이다. 일에 사람을 맞추면 결과가 좋을 수 없다. 함께한 배우들을 모두 영화 작업 전부터 잘 알고 있던 편이라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김보년│영화 속에서 ‘러시안 소설’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는 하지만(“길이가 길고, 인물도 많이 등장해요”) 그 말 자체가 어떤 선입견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제목을 정할 때 어떤 느낌을 의도했나.


신연식│제목에 대한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이 제목을 쓴 이유는 내 삶이 누군가에게는 창작의 소재로 쓰일 수도 있고, 어떤 관점으로 내 삶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각자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러시아 소설이냐 프랑스 소설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27년을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사실은 러시아 소설이 아니라 한국 소설이더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객들도 러시안 소설 같은 삶을 각자 다르게 상상할 것이다.


김보년│감독님이 잠깐 출연하던데, 원래 계획한 것이었나.


신연식│그렇다. 나는 내 작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배우들에게 대사 한 마디만 주더라도 그 친구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며 쓴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돈을 주거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돈을 줄 수 없으니 비전을 줘야 할 텐데, 내가 맡은 역할은 비전을 줄 수 있는 역할이 아니었다(웃음). 그래서 내가 했다.



관객1│인물들의 이름을 배우들의 실제 이름으로 지었다.


신연식│내가 연기 레슨을 해주던 배우들과 함께 촬영한 것이라 배역이 헷갈리지 않도록 그대로 사용했다. 상업영화를 할 때도 조연의 경우는 배우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배우들에게 너 이외의 배우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인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배우들이 대본을 보고 더 집중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신효’, ‘재혜’처럼 이름 자체가 특이하고 예쁘기도 했다.


김보년│<좋은 배우> 때도 그렇고 이 영화의 숲도 그렇고, 공간 헌팅이 인상적이다.


신연식│영화에 등장하는 담양은 영화에 투자를 해준 친구의 고향이다. 여행을 갔을 때 미리 헌팅을 해둔 곳이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체크해 본다. 시나리오를 쓰고 난 다음 배우와 공간을 찾으면 예산에 맞출 수가 없다. 특히 독립영화를 찍을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막연한 기대만 갖고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장소도, 캐스팅도 다 정해 놓은 다음 시나리오를 썼다.


관객2│영화 속에서 “21세기에는 비즈니스의 영향이 더 커지고 있어”라는 대사가 나온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예술과 비즈니스의 관계에 대한 지론이 궁금하다.


신연식│기본적으로 영화는 산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는 특이하게도  50~70억이 들어가는 이벤트 산업이자 벤처 산업이다. 그 이벤트에 비해 규모가 큰 산업이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두루 살필 역량을 가진 사람이 제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도 <러시안 소설>로 새로운 제작 방식을 실험해 보았다. 친구들에게 투자를 받았고, 현장 스태프는 나와 촬영감독, 동시녹음기사, 그리고 밤에만 오는 조명감독이 전부였다. 더 큰 예산으로 많은 스탭들과 작업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저예산으로 진행했다.


한국의 영화 제작은 30억짜리 영화에 맞춰져 있다. 3억짜리 영화를 찍어도 30억짜리 영화와 제작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냥 장부에서 ‘0’만 하나 빼는 것이다. 하지만 저예산에는 저예산에 맞는 제작 방식이 있다. 그렇게 할 때에만 더 다양한 영화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제작비 5억, 10억을 쉽게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 돈도 굉장히 큰 돈이다. 내 개인적인 기준으로 총 제작비 2억 5천이면 이미 산업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2억 5천을 넘지 않는 제작비로, 그에 맞는 적절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관객3│영화의 처음과 끝에 ‘어제 놓친 고기를 잡기 위해 오늘 잡은 고기를 놓아주는 낚시꾼’ 이야기가 나온다.


신연식│이 영화를 만들기 전 전작의 흥행 실패로 억대의 빚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20년간 해온 영화를 그만둘까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내가 잡다 놓친 물고기를 잡으려고 지금 잡을 수 있는 물고기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대사가 나오더라.


관객4│저예산으로 영화 작업을 하기로 하고 시나리오를 쓰면 현장이나 후반 작업에 대한 부담이 있을 텐데.


신연식│전혀 없었다. 시나리오를 완성 안 시키고 촬영을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특히 더 좋은 엔딩을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경우도 있다. 나는 창조적인 ‘능력’이 사람에게 기본적으로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창조적인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려 한다. 현장에서 나를 통해 일어나는 일은 나의 상상력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일어나는 변수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시나리오를 쓸 때도 전략은 80%만 짜는 것이 맞다고 본다. 100%를 짜면 생각했던 것과 조금만 달라도 전체가 어그러진다. 80%를 짜야 현장에서의 대처와 맞물려 100%가 완성된다. 나에게 시나리오는 설계도라기보다는 지도이다. 보물을 찾기 위해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널지 배를 탈지는 보물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정하는 것이다. 다만 찾으려는 보물을 중간에 바꾸는 것은 안 된다. 감독은 그 하나의 보물을 계속 보는 사람이고 주어진 환경에 따라 수단과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결정하는 사람 말이다.


관객6│왜 나레이션을 ‘많이’ 사용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영상미가 기억에 남는데 이를 위해 어떤 것을 고려하는지도 궁금하다.


신연식│형식적으로 누군가의 삶을 누군가의 관점으로, 그리고 소설 형식을 빌려서 그린 것이기 때문에 옛날 소설의 삽화 같은 느낌으로 나레이션을 넣어 보았다. 그리고 나레이션을 사용하면 동시녹음기사가 없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도 좀 했다(웃음). 영상미를 위해서는 로케이션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촬영의 기술적인 고려 이전에 이 공간을 어떤 성격의 공간으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지금 이 극장에서 영화를 찍는다고 할 때 단순히 좋은 그림, 배우의 동선, 카메라 위치를 먼저 생각하는 것보다 이 극장에 어떤 성격을 부여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걸 잘 설정하고 나면 좋은 그림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김보년│그렇다면 우연재(영화 속 소설가들이 함께 모여 사는 집)는 어떻게 설정했나.


신연식│사실 우연재는 한곳에서 촬영한 것이 아니다. 한 공간에서 찍다가 쫓겨나면 다른 곳에 가서 찍었다. 그래서 우연재는 100%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찍지 못했다. 예산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리고 별도의 미술팀만 있었어도 더 좋았을 것이다.



관객7│영화 속에 신효가 창작한 소설이 여러 개 나오는데, 그중 ‘조류인간’은 독립적인 영화로 만들 계획이 있다고 들었다.


신연식│<조류인간>은 지금 당장 찍을 준비를 다 해놓았다. <러시안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러시안 소설>의 시나리오를 쓸 때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욕을 할 수도 있겠다는 각오를 했었는데 <조류인간>은 훨씬 흥미진진하다.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신비로운 느낌으로 다루었다.


김보년│<페어 러브>도 그렇고 감독님의 영화에서 나이 든 사람이 비교적 더 멋있게 그려진다. 감독님께 중년이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


신연식│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렸을 때 당한 것을 나이 먹어서 똑같이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모르고 당했던 것을 나이를 먹으면 알고도 당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도 둘 사이에는 어떤 다름이 있는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이런 느낌이 커진다.


김보년│개인적으로 캐릭터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열등감이 기억에 남는다. 신효도 신효지만 성한어디로 갔을지 궁금하다. 성한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가 과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신연식│신효와 성한은 내가 갖고 있는 양면의 콤플렉스를 다 반영한 것 같다. 감독님들 중에는 스타일이 세련되고 학식이 넘치는 분들도 있고, 예술혼을 완전히 불태우시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양쪽 다 아니다. 내 인생이 잘 안 풀리는 것도 내가 애매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다. 신효가 성한에게 느끼는 콤플렉스, 성한이 신효에게 느끼는 콤플렉스를 나는 다 갖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성한은 크리에이터가 아니다. 신효도 딱히 크리에이터는 아니었는데 이상한 방식으로 둘이 협업을 할 때 크리에이션이 발현된 것이다. 성한은 아마 그 순간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을 것 같다. 신효가 잠들어 있던 것처럼 성한도 27년의 세월을 거기서 못 벗어난 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을 성한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리│김지혜 자원활동가 

사진│김윤슬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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