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1958)는 한 도시 속의 두 도시 이야기다. 윌로 씨가 살고 있는 쪽에선 담쟁이덩굴과 이끼가 감싸 안은 집, 떠돌이 개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리, 인간의 손때가 묻은 담벼락, 마부가 마차를 끄는 새벽길을 볼 수 있다. 그곳엔 시장이 있고, 사람들의 대화가 있다. 상인은 할머니가 알아서 배추를 가져가도록 놔두고, 토마토를 떨어트린 소녀는 몰래 도망가며, 윌로 씨의 가방에 든 생선이 가판대 아래 앉은 개의 성질을 건드리는 그런 곳이다. 그들은 살기 위해 산다. 윌로 씨의 처남 가족이 지내는 쪽의 풍경은 완전히 다르다. 회색 빛 건물이 줄지어 섰고, 검은 아스팔트가 각 구역을 뚜렷이 나눈다. 공장장인 처남이 출근하면 웃으며 잡담을 나누던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척한다. 그곳의 사람들은 효율성과 공간과 일과 시간에 맞춰 산다. 윌로 씨의 집과 처남 가족이 사는 집의 모습은 더 판이하다. 벽과 계단과 창문과 빨랫감 등이 모여 번잡하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룬 곳이 윌로 씨의 집이라면, 처남의 집은 현대미술품과 갖가지 기구를 갖춰 모던함을 뽐내는 초현대식 저택이다. 자크 타티가 세상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리도 단순하다. 구태여 어렵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나의 아저씨>는 <윌로 씨의 휴가>(1953)와 <플레이타임>(1967) 사이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단지 사이에 놓인 작품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앞뒤 작품을 연결하기도 한다. <나의 아저씨>는 바닷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윌로 씨의 휴가>와 번잡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 <플레이타임>의 완충지대 역할을 맡는다. <윌로 씨의 휴가>에 처음 등장해 슬랩스틱의 전형을 선보인 윌로 씨 캐릭터는 <나의 아저씨>에서 변화를 맞이한다. 단편영화부터 이어온 아크로바트 스타일은 상당 부분 희석되고, 대신 타티는 우아하고 정교한 코미디를 구사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일상의 코미디’다. 타티는 “윌로 씨는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남자다. 무대의 인물이 아닌 거다. 그는 자신이 우습다는 걸 모른다.”라고 말했다. 대사를 배제한 타티의 슬랩스틱이 옛 무성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거기다. 그는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처럼 화면을 장악하지 않으며, 막스 브라더스처럼 현실의 벽을 뛰어넘는 법도 없다. 윌로 씨의 이야기는 일상의 슬랩스틱에 바탕을 둔다. 보는 사람이 혀를 내두를 만한 게 아니라 “맞아, 저럴 수 있어”라고 동감하며 미소 짓는 대상인 것이다. 카메라가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윌로 씨와 그의 주변을 바라보기만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폴리 카엘이 언급했듯, 윌로 씨가 행하는 육체의 코미디는 웃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녀의 말을 확인하려면 <나의 아저씨>의 초입을 보는 것으로 족하다. 귀가한 윌로 씨가 창문에 비치는 햇살을 조절하는 중이다. 얼핏 그가 창문을 적당히 열어놓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카메라의 위치가 바뀌면 건너편 집 새장의 새에게 마음을 베풀고 있음이 밝혀진다. 그는 자기 집 창으로 비치는 햇살을 새와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다. 타티는 인간미를 희구한다. 그의 영화가 무성영화의 성격을 고수하는 것도 이미지를 전면에 드러내려는 의도라기보다 마음의 소중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윌로 씨의 휴가>의 한 장면에서 남자가 읽는 신문 기사에는 ‘자본주의는 너무 많은 말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타티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타티가 현대사회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건 아니다. 기실 <나의 아저씨>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가치를 해체하는 현대사회에 던지는 일갈이지만, 타티는 현대사회의 속도와 번잡함과 번지르르함을 무턱대고 비판할 마음이 없다. 오히려 소란의 일인자는 윌로 씨 자신이며, 타티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버티며 사는 사람들을 지긋한 여유로 대한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존재는 아이와 거리의 강아지들이다. 아이는 윌로 씨의 흉내를 곧잘 내며, 강아지들이 언제나 그의 뒤를 쫓는다. 타티의 영화를 통과하려면 때 묻지 않은 마음이 요구된다. <나의 아저씨>는 구역을 벗어났던 떠돌이 개들이 다시 윌로 씨의 세계로 돌아오면서 끝난다. 두 세계를 구분 짓는 건 허술하게 무너져 내린 벽돌담이다. 두 공간 사이를 오가기란 그렇게 쉽다. 우리는 그 쉬운 길을 건너기는커녕 한쪽만 향하며 산다.

글/이용철(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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