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1 시네바캉스 서울/Review

브라이언 드 팔마의 '드레스트 투 킬'

“하릴없이 미술관에 앉아 있었다. 무슨 전시였는지는 가기 전에도 몰랐지만 보면서도 잘 몰랐다. 사람이 크게 붐비지 않은 걸 보니 인기 있는 작가는 아니었지 싶다. 그림체가 일관되지 않았던 걸 보면 개인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지 나는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미술관에 앉아 있었던 거니까. 매일 집에서 집밥 같은 섹스가 있기는 있어 왔다. 허나, 엄밀히 말하면 그건 성행위를 모사한 집안일에 불과했다. 성감도 뭣도 없이 마냥 고단한 노동일 뿐. 어쩌면 내 팔자의 섹스는 고작 이런 식으로 끝나버릴지 모르겠다는 상실감에 명상삼아 머리도 씻을 겸 세 시간쯤 벽을 보고 있고 싶었는데, 벽만 마냥 봐도 미쳤다 소리 안 들을 공간이 미술관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미술관에 마냥 앉아 있었다. 한참 그렇게 있으니 현실 감각도 좀 되돌아왔다. 집에 가는 길에 칠면조를 사가야 한다는 사실도 떠올랐던 걸 보면. 그런데 그 순간, 정말이지 기적처럼. 나는 ‘세상이 두 쪽 날지라도 지금 당장 섹스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낯선 이를 만났다. 미술관에서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다니 도무지 말이 되지를 않지만, 그보다 더욱 비현실적이었던 건 그 다음이었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서로 몇 차례 더 시선을 교환하게 됐고, 합승을 가장한 택시 뒷좌석에서 마른하늘의 날벼락보다 더 기막힌 섬광처럼, 섹스를 하게 됐다. 택시 기사의 노골적인 염탐질도 아랑곳 않고 계속 되던 행위는 그 사람의 집까지 이어졌고, 밤새 우리는 맺힌 욕망을 짐승처럼 풀고 털고 뱉었다. 그건 눈물이 쏙 빠질 정도의 근사하고 우렁찬 섹스였다. 자, 여기까지만 보면 이건 꽤 완벽한 엔딩이다. 허나 그 후의 에필로그는 말하자면 별로 유쾌하지 않은 쪽이었다. 제정신이 돌아온 후 황급히 그 사람의 아파트에서 빠져나오던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면도칼로 난자되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목격자들이 있었던 와중에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 한 채 말이다.”


<드레스드 투 킬>의 초반 30분을 대략 정리하자면 이런 식일 것이다. 글로만 읽으면 개연성과 진부함의 경계 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단선적이지도 않고 미묘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의 감정을 어떻게 영화로 풀어낼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를 않는다. 이 감정들을 커트 단위로 썰어 내다보면 얼마나 많은 뉘앙스들이 휘발되겠는가. 자칫하면 그냥저냥 졸속 제작되는 에로물들과 차별점 하나 없이 딱 그 짝이기 십상 아니겠는가. 이런저런 의구심과 의혹이 가짓수 많게 펼쳐지기 마련인데, 구태여 그걸 스스로 누를 필요는 없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기우들은 순식간에 부서져버리기 때문이다. 30분짜리의 거대한 오프닝 시퀀스는 단 한 호흡으로 휘몰아치며 쉼 없이 질주한다. 지독히 처절한 상실감부터 우아하고 짜릿한데다가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인 성감, 보는 사람의 뇌와 가슴에까지 반드시 생채기를 내고야 마는 살인까지. 그게 전부, 쉼표 하나 없이 덩어리 딱 하나로 그냥이다. 프레임 바이 프레임으로 잘라 뜯어보더라도 연출의 섬세함과 치밀함은 부실한 구석을 찾기 힘들다. 영화 속 여성의 가슴 노출 횟수, 베드신 등장 횟수, 살인 음모 반전의 타이밍 맞춘 플롯 포인트까지, 투자자의 요구에 모범답안을 정확히 제시하는 와중에도 감독 스스로 끝까지 유희하는 밸런스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이건, 깎아지른 완벽이다. ‘모름지기 이런 것이 상업영화’라는, 다음 세기가 되더라도 명증한 레퍼런스의 하나로 남을 작품임에 틀림없다.

글/이해영(영화감독 <페스티벌> <천하장사 마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