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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신이 내린 축복같은 소박한 사랑의 기적

[리뷰] 에릭 로메르의 <겨울 이야기>


<겨울 이야기>의 주인공 펠리시는 미용사다. 그녀는 ‘미’를 다루는 게 자신의 직업이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펠리시는 세 명의 남자와 만나고, 그 세 명 중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한다. 선택의 기준은 미적 취향에 의거한다. 펠리시는 먼저 동년배의 친구 로익과 자신이 일하는 미장원의 사장 맥상스를 두고 고민한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로익은 지적이고 부드러운 남자이지만 펠리시는 그에게 위축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펠리시의 미적 기준은 지혜와 강인함이다. 로익을 마음에 들어 하는 홀어머니는 남자의 아름다움이 지적 능력에 있다고 말하지만, 펠리시는 경험에서 오는 지혜를 갖고 있고 육체적으로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를 좋아한다. 영화의 한 장면, 느베르에서 펠리시는 맥상스와 거리의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본다. 전통도자기 가게 앞에 멈춘 펠리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나오는 비너스와 활과 화살을 든 큐피트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를 본다. 비너스는 미의 여신이고 큐피트는 사랑의 신이다. 이 장면은 비너스와 큐피트의 관계를 빌어 미적 취향이 사랑을 낳는다는 가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펠리시는 여름 브르타뉴의 해변에서 우연히 샤를르를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누고 파리로 돌아오는 기차역에서 서로의 연락처를 나누다 실수로 틀린 주소를 가르쳐주어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한다. 그의 아이를 낳게 되면서 펠리시는 언제까지 그를 기다려야 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이 영화에서 겨울은 차갑고 혹독하다. 긴 기다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로익이 읊는 빅토르 위고의 시도 기나긴 겨울의 혹독한 기다림을 상징한다. “황폐해진 겨울 거리에. 사물의 두께 밑에. , 나무, 야수, ,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무게. 엄청난 깊이에. 영혼이 꿈꾸네. 그것은 무엇인가? 신의 꿈이라네.



맥상스와 헤어져 파리로 돌아온 펠리시는 로익과 세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관람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은 왕비가 죽은 후 15년이 지난 뒤 왕과 딸이 서로 만나는 장면이다. 딸을 만난 왕비는 이렇게 말한다. “신이시여, 당신의 은총을 나의 딸의 머리 위에 내려주소서. 신께서 네게 희망을 줄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결과를 알기 위해 내 자신을 지켜왔단다.” 모성의 지극한 사랑을 담은 이 작품을 보며 펠리시는 믿음이 그를 살린 거라 생각한다. 로메르는 여기서 믿음과 기적의 문제를 펠리시의 선택과 연결한다. 로익은 그녀에게 샤를르를 만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그러기에 인생을 망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펠리시는 그러나 다른 생각이다. 그녀는 자신이 샤를르를 다시 찾는다면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며, 그걸 위해 삶을 기꺼이 바칠 만큼 큰 기쁨이기에 희망을 갖고 사는 게 가치 있는 삶이라 말한다. 펠리시의 주장은 로익이 말하듯이 파스칼의 ‘내기’와 비슷한 점을 갖고 있다. 파스칼은 영혼의 불멸에 내기를 걸 때, 그 이득은 희박한 가능성을 보상할 정도로 무한하지만, 영혼이 불멸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믿는다면 믿지 않는 것보다 더 잘 살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오랜 기다림 끝에 펠리시는 신이 내린 축복처럼 소박한 사랑의 기적을 얻는다. 이는 지극히 로메르적인 결말이다. 로메르는 유작 <로맨스>에서 이와 비슷한 세계를 다시 한 번 그려냈다. (임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