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혹은 남성 집단에 대한 치열하고 묵직한 탐구를 이어가며 ‘폭력의 피카소’라고 불리던 샘 페킨파의 필모그래피에서 70년대 중반 무렵은 가장 저평가되는 시기이다. 초기 페킨파 영화들에 비해 다소 평범하거나 실망스러운 대중영화의 외양을 지닌 영화들이 줄지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페킨파의 하락세의 시작점으로 지목되는 작품이 <겟어웨이 The Getaway>(1972)다.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1967)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도주극들과 일견 큰 차이가 없는 평범한 내러티브를 가진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겟어웨이>는 페킨파의 영화적 스타일과 세계관이 대단히 과감하고 첨예한 방식으로 드러나 있는 영화이다. 


무장 강도혐의로 10년형을 살고 있는 닥 맥코이(스티브 맥퀸)는 가석방이 좌절되자 아내 캐롤(앨리 맥그로우)을 통해 유력한 지인 배넌(벤 존슨)에게 석방시켜줄 것을 부탁한다. 배넌은 그 조건으로 맥코이에게 은행털이를 제안하며 어딘지 미심쩍은 동업자들을 붙여준다. 맥코이 부부는 우여곡절 끝에 은행을 터는 데는 성공하지만, 경찰과, 동업자와, 배넌의 패거리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페킨파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고속촬영과 교차편집, 그리고 프리즈 프레임을 거침없이 활용한다. 수감 중인 맥코이가 노역으로 조작하는 기계의 소음을 기반으로 10분 남짓 이어지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교차편집과 프리즈 프레임만을 이용해 시간을 자유자재로 뛰어넘거나 지연시키며, 내러티브적 상황과 인물의 강박적이고 불안한 정신 상태를 완벽하게 드러낸다. 또한 출소 직후 맥코이 부부가 공원으로 산책을 가는 장면에서는 고속촬영과 교차편집을 통해 아예 시간의 순서를 뒤섞어버리며 영리하게 관객을 교란한다. 애초에 이 모든 기법들이 시간을 변형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겟어웨이>에서는 이런 장치들을 통한 시간의 변형을 훨씬 과감하게 탐구한다.


또한 이 영화에서는 페킨파의 세계관 역시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평원 Ride the High Country>(1962)이나 <와일드 번치 The Wild Bunch>(1969)에서 확인할 수 있듯 페킨파는 스러져가는 서부의 기억을 끝내 잡아보려 애쓰는 작가였다. ‘페킨파는 전원을 옥죄어가는 돈과 기계들을 찍었다’는 캐서린 머피의 표현처럼, 그것은 서부에 대한 애착이기도 했지만 전원이나 자연 자체에 대한 애정이기도 했다. 언뜻 드넓은 목초지를 뛰어노는 것처럼 보이는 사슴들이 사실은 교도소의 뒷마당에 갇혀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의 첫 장면과, 오프닝 시퀀스 내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날카로운 기계의 소음은 페킨파의 전원주의를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영화 후반의 쓰레기차 시퀀스에서 훨씬 더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이 장면에서는 쓰레기를 퍼올리고, 쏟아 담고, 압축하는 기관들의 움직임을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상세하고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이 기관들은 내러티브적으로도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며, 기계에 대한 페킨파의 적개심을 다분히 드러낸다.
사실 <겟어웨이>는 대중영화로서의 본분 역시 완벽하게 수행하는 영화이다. 피와 총탄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적절하게 유지되는 유머러스함과, 의심의 여지없이 멋지게 연출된 액션 시퀀스들은 관객들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멀끔한 대중영화의 모양새를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목도하게 되는 페킨파의 날카로운 시선과 장인적 손놀림이야말로 <겟어웨이>를 만나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다.(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Cine-Talk
1월 21일(금) 19:00 <겟어웨이> 상영후 이명세 감독 시네토크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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