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파스칼의 내기’라고 불리는 흥미로운 논증을 제시한다. 신을 믿을 경우, 신이 없으면 아무런 이득도 없지만 신이 있으면 천국에 간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을 경우 신이 없으면 아무런 이득도 없고 신이 있으면 지옥에 간다. 그러므로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면 신을 믿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에릭 로메르는 이를 사랑에 적용한다. 파스칼의 내기에 대한 로메르식의 해석인 <겨울 이야기 Conte d'hiver>(1992)는 믿음과 대한 작고 기적 같은 이야기이다.



펠리시(샤를로트 베리)는 휴양지에서 샤를르(프레데릭 반 덴 드리에슈)를 만나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 이상적인 나날을 보낸다. 휴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샤를르에게 주소를 건넸지만, 5년이 흐른 뒤에 그녀는 그때 생긴 딸을 키우며 여전히 샤를르를 기다리고 있다. 미용사 일을 하며 애인인 로익(에르베 퓌릭)의 집에서 지내던 펠리시는 또 다른 애인인 맥상스(미셸 볼레티)를 따라 느베르로 이사하게 되지만, 보채는 딸에게 마지못해 이끌려 들어간 성당에서 묘한 깨달음을 얻고 파리로 돌아온다.



펠리시의 여러 얼굴을 자주, 그리고 진중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에는 그녀의 시점숏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한 번, 샤를르와 비슷한 사람을 쫓아 시장으로 들어갔을 때 쓰이는 시점숏은 어느 특정한 인물도 주목하지 않고 수많은 익명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때의 프레임은 텅 빈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 샤를르와 펠리시가 휴양지에서 사랑에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나서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펠리시의 얼굴뿐이다. 숏의 빈도나 지속시간, 앵글까지 모두 온전히 펠리시에게 집중되어있다. 이는 <겨울 이야기>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펠리시는 영화 내내 한결같이 샤를르를 기다리며, 주변의 모든 인물들과 샤를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샤를르가 돌아오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 되었든 펠리시는 샤를르가 돌아올 것을 믿으며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겨울 이야기>가 응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펠리시의 그 믿음이다.



그러나 “나는 도식화를 원치 않는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Ma nuit chez Maud>(1969)에서 나는 한 명의 맑시스트와 한 명의 카톨릭주의자를 보여주는 것이지, 맑시스트와 카톨릭주의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로메르의 말처럼, 영화의 라스트에 펠리시에게 찾아오는 기적이 믿음에 대한 강요나 약속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을 가지고 살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을 가지고 살면 기적이 찾아올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파스칼의 내기는 여전히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믿어보기로 하는 것이다. 펠리시에게 찾아오는 기적은 파스칼의 내기에 응할 용기를 준다. 로메르와 눈을 맞추고 그것을 건네받을 수 있는 이들에게, <겨울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소박한 기적이, 희미하지만 분명히 빛나는 녹색광선이 된다. (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1월. 25일. 14:00 에릭 로메르의 <겨울 이야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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