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에릭 로메르의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l'arbre, le maire et la mediatheque> “혹은 일곱 개의 우연”(ou les sept hasards)은 에릭 로메르가 ‘계절 이야기’연작을 이어나가던 중 뜻밖에(par hasard) 내놓은 영화다. 더욱 뜻밖인 점은 로메르가 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정치적 주제를 다룬다는 것이다. 허나 묵직한 사건과 심각함은 없으며 계몽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외려 코믹하다. 가장 유쾌하고 희극적인 분위기를 띠는 때는 진지하고 열띤 토론의 순간이다. 일곱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각 장마다 일곱 개의 가정을 던지고 있는데, 도입부터 다함께 “만약에”(si)를 힘차게 외치며 시작된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만약에 줄리앙이 소설가 베레니스 보리바쥬에게 반하지 않았더라면” 미디어테크는 어떻게 되었을까.

젊고 야심찬 진보적 정치인 줄리앙(파스칼 그레고리)은 프랑스 방데지방 작은 시골도시의 시장이다. 그는 시골의 자연에 깊은 애정을 품으며 대도시에 뒤지지 않는 문화적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 바로 복합체육문화시설인 미디어테크의 설립을 통해서! 그러나 그의 의욕 넘치는 프로젝트에 한 그루의 나무와 몇몇 사람들이 우연히 끼어든다. 먼저 그의 연인 베레니스(아리엘 동바슬)는 시골을 따분한 곳 취급하며 미디어테크의 주차장이 혐오스럽다고 지적한다. 학교 교사 마크(파브리스 루치니)는 미디어테크 부지로 선정된 들판과 거기 있는 늙은 버드나무의 아름다움을 내세우며 이에 강력히 반대한다. 그가 보기에 이런 종류의 진보는 시골에 대한 도시인의 왜곡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도시적인 것의 침입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에 잡지사 여기자 블랑딘(클레망틴 아무루)이 관심을 기울이고 마지막으로 깜짝 선물처럼 마크의 열 살 내기 딸 조에(갈락시 바르부스)가 등장하면서 미디어테크 설립의 운명은 점점 알 수 없게 되어간다.


짐작하겠지만 이 이야기의 목적은 우연들을 정교하게 맞물리며 완성도를 갖추는 것이 아니다. 사실 가장 큰 즐거움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대화와 토론 그 자체다. 인물들은 과장된 제스쳐로 자아도취적인 열변을 토하며 서로의 모순을 드러내고 부딪힌다. 이를테면 가장 진보적이어야 할 생태주의자 교사는 외려 과거 회귀적이다. 시장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지 못한다.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철 덜든 공주님 같은 인상의 아리엘 동바슬은 꿈꾸는 듯한 표정과 제스처로 도시 찬양에 열을 올린다. 그 와중에 열 살 어린이 조에의 똑 부러지는 제안은 기쁨이다. 그리고 로메르는 이 사이로 진실을 놓치지 않는다. 블랑딘이 마을을 취재하며 만나는 사람들은 실제 지역주민들이다. 쓸쓸하기도, 귀엽기도 한 소박한 증언들. 이 지점에서 픽션과 논픽션이 천연스레 이어지며 영화는 생기를 띤다. 스크린 속 들판에 바람이 분다.

로메르의 영화를 보고나면 어쩐지 그가 현자일 것만 같은 믿음이 생긴다. 사람의 심리처럼 보이지 않는 것, 숨겨진 것들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그의 모럴리스트적 면모 때문일 것이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에서 그는 세계와 역사를 꼭 그렇게 사람 마음 다루듯 대한다. 가정의 문장들을 던지고, 다양한 인물들을 맞닥뜨리며, 세계의 틈새를, 그 사이로 새어나가 보이지 않게 되어버리는 우연들을 건져낸다. 이를테면 세계의 심리 같은 것, 이라고 조금 비약해도 괜찮을까. 마지막 장면, 우연의 틈새들에서 새어나오는 그 마음의 노래소리가 즐겁다. (백희원_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에디터)

시네토크
1월 25일(화) 19:00 에릭 로메르의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상영후 정성일 평론가의 시네토크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