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30. 18:31ㆍ시네아스트의 초상/라울 월쉬 - 할리우드 매버릭의 모헙
시네토크
라울 월쉬의 영화 세계 <라울 월쉬 또는 좋았던 옛 시절>
지난 4월 27일 <라울 월시 또는 좋았던 옛 시절>(1966)의 상영이 끝나고,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라울 월시의 영화에서의 액션과 운동성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오늘 보신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작품은 <왕과 네 여왕들>(1956)이다. 클락 게이블이 주연인 작품이다. 라울 월시는 영화 경력 거의 말년에 클락 케이블과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그 중 <거인>(1955), <검은 태양은 밝아온다>(1957)가 상영이 된다. 클락 게이블은 1960년에 세상을 떠났고, 라울 월시의 배우들이라고 할 수 있는 험프리 보가트나 에롤 플린 같은 배우들이 1957년 즈음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어느 시점에서 월시 영화에서 운동적 특징들을 대표했던 배우들이 세상을 떠나고, 오늘 보신 다큐멘터리가 환기시키는 것처럼 월시에게 있어서의 ‘좋은 시절’은 그 때 끝나버렸다. 한편으로 이러한 죽음은 영화사적으로도 그렇다. 월시는 영화의 탄생에 입회했던 사람이고, 영화 매체의 고전적 몰락의 시기를 지켜봤던 사람이다. 라울 월시, 존 포드, 하워드 혹스 같은 이들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인간의 삶보다 더 큰 세계를 만들었다. 이 세대의 감독들은 단지 영화를 만든 이들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만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말년에 월시가 게이블과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영화의 말년이 갖고 있었던 특별한 상황에 있었다. 게이블은 MGM의 전속 배우였다. 50년대 이르게 되면 고전적 스튜디오의 붕괴의 시기가 도래하는데, MGM 역시 스튜디오를 매각하게 되고, 이것은 굉장히 큰 사건이 되었다. 스튜디오의 입장에서는 저비용으로, 좋은 영화들을 만드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나이도 많고 급료가 높았던 게이블은 MGM에서 나와 이십세기폭스나 워너브라더스에서 영화를 하게 된다. 게이블의 말년의 인생이란 좋은 말로 하면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나쁜 말로 하면 집에서 방출된 이었다. 그래서 <검은 태양은 밝아온다>에서의 게이블은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스튜디오의 황금기를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노예 해방을 다룬 이 영화에는 최소한 ‘자유’라는 단어가 스무 번 이상은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게이블은 자신이 갖고 있었던 모든 집과 농장을 전소시켜버리고, 마지막에는 그 곳을 떠난다. 마지막 장면의 떠남의 이미지는 굉장히 몽환적인 비전으로 그려져 있다. 월시 혹은 게이블에게 있어서 스튜디오의 몰락이라는 것은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월쉬는 이를 두고 “태양이 이제 서부에서 저물고, 우리는 이제 꿈의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한 몰각의 느낌을 <검은 태양은 밝아온다>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월시는 영화의 탄생과 몰락을 지켜봐야 했던 사람인데, 자신의 인생이 끝나간다는 것을 50년대에 자각하고 있었고, 그런 것들이 게이블과의 세 편의 작품들에서 잘 드러나 있다.
월시적인 영화의 특징을 살펴본다면, 무엇보다 그 핵심을 운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운동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의 ‘무빙’에 가까운 것이다. 유럽적인 의미에서 영화를 지칭하게 되면 흔히 ‘시네마토그래프’라거나 ‘시네마’라는 표현을 쓰는데, 거기에는 운동성의 감각이 기입되어 있지 않다. 반면 영화를 ‘무비movie’, ‘모션 픽쳐motion picture’라고 표현하는 데에서 드러나듯이, 미국은 가장 움직임에 근거해 영화를 만들었던 나라다. 에드윈 포터의 <대열차 강도>(1903)를 보면 이런 운동성이 크게 추적과 댄스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시는 그런 영화의 발생적 특징들을 영화에 구현했고, 움직임을 새롭게 창안했던 감독이다. 무성영화가 갖고 있었던 위대한 운동성을 유성영화에서도 소진하지 않고 표현해냈던 몇 감독들이 있는데, 혹스나 포드, 월시를 들 수 있다. 월시의 영화에서 그런 부분들은 추적 장면에서 자주 표현된다. 예를 들어 <그들은 밤에 달린다>(1940)를 보면 거의 모든 자동차 액션의 진수가 이 영화에 들어가 있다. 이러한 액션들은 지금 보기에도 충분히 쾌감이 있다. 화면이나 앵글, 움직임이 굉장히 입체적이다.
<맨파워>(1941)의 경우도 그런 장면들을 볼 수가 있다. 똑같이 추적 시퀀스를 찍어도 히치콕이 서스펜스 기법으로 관객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반면에, 월시의 경우는 굉장히 솔직하다. <하이 시에라>의 마지막 추적신에는 심리적인 갈등 같은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 점이 흥미롭다. 도주하는 차량이 있고, 그를 뒤쫓는 경찰들의 행렬이 있다. 그 속도감과 움직임의 느낌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쫓고 쫓기는 심리적 긴장감은 중요치 않다. 월쉬의 영화에서 추적을 긴장으로 이끄는 팽팽한 끈이란 없다. 그것은 신경증적이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질주이다. <맨파워>도 그렇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감전의 위험을 무릅쓰고 매번 송전탑에 올라야 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이런 월시적 세계는 리얼리즘적인 사회파라기보다는 휴스턴 영화에서의 자연적 세계에 가깝다. <맨파워>에는 뮤지컬 적인 요소도 있다. 스크루볼적이고, 20년대의 슬랩스틱의 전통과도 비슷한데, 그런 점은 혹스의 경우와 닮았다. 신체에서 비롯되는 코미디가 강조하는 운동성의 느낌들이다. 하지만 두 작가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시절, 고전기의 감독들이 작가로 인정받게 될 때 개인의 작가적 특징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가는 굉장히 흥미로운 문제이다. 스튜디오 시스템은 감독들의 작업에 관여와 통제가 많았기에, 그 많은 영화들을 만들면서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는 궁금증의 대상이다. 월시의 경우는 그 자신이 배우로써 출발했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를 컨트롤해나가는 부분이 컸을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장면을 컨트롤해나가는 것인데, 그것은 촬영의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혹스가 플랫한 화면들을 사용한 것과 달리 월쉬는 대단히 입체적인 화면들을 구사한다. <하이 시에라>(1941)의 초반부에 나오는 자동차 액션의 시퀀스를 보면 언제나 흥미롭다. 보가트가 앞 차를 추월하려는 순간에 갑자기 토끼가 등장하고, 이어 자동차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데 원 테이크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방식으로 촬영했을지 놀라운 순간이다. 동시에 이 장면은 월시를 영화적 세계로 이끌었던 하나의 출발점, 즉 자신의 눈을 잃게 만든 우연적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장면에서 토끼의 우연적 출현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의 교란은 인물들을 다른 세계로 이끌어 간다. <하이 시에라>는 보가트의 첫 주연작이고 이 영화로 굉장히 유명해졌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던 존 휴스턴은 이후 보가트와 영화들을 찍었다는 점에서도 굉장히 흥미로운 출발점이 된 영화다.
월시의 영화에선 무엇보다 그런 속도들이 느껴진다. 영화 속 인물들은 비운의 캐릭터들인데, 그들은 이 모험적인 세계 안에서 굉장히 빨리, 세계가 퇴락해가는 속도보다 더 빨리 이 세계를 빠져나가려 하는 것 같다. <젠틀맨 짐>(1942)을 보면 주인공의 승승장구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이 남자의 성공은 관객들의 기대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정도로 예기치 않은 것이다. 움직임만이 아니라 이후의 전개를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의 속도가 있다. <결투 1대 3>(1953)에서 출소한 남자 주인공은 감옥에서 썼던 자신의 회고록을 출판사에 갖다 주는데, 그 책을 다 읽은 뒤에 편집자가 이런 얘기를 한다. “아직 모르겠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아직도 모르겠어.” 이 말은 월시적인 이야기 진행의 특징을 지칭하는 것처럼 들린다. 일반적으로 클라이맥스라고 부를 법한 것이 이미 초반에 등장하기도 한다. 액션의 연출과 관련해서 보자면, <화이트 히트>(1949)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 영화 중반부쯤에, 제임스 캐그니가 감옥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듣고 벌이는 신경발작적 액션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퀀스가 각기 다른 각도나 위치에서 촬영된 장면들의 연속동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체적인 움직임들에서 캐그니의 행동의 일관성이 유지된다. 그는 예정되어진 액션의 경로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엇보다 맹렬한 에너지를 소진하며 몇 명의 수비수들을 따돌리는 럭비선수처럼 출구를 향해 나아간다. 이 장면은 각도와 거리, 위치를 달리하는 몇 대의 카메라로 촬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운동적 에너지의 연속성은 지속되지만, 그것이 판에 박힌대로 보여지지 않는다. 캐그니가 자기 에너지를 소진해나가면서 질주하는 속도와 함께 원경에서 촬영된 장면들은 그가 감옥의 공간에 갇혀있다는 것을 여전히 강렬하게 표현한다. 동시에 신분을 위장해 잠입한 남자의 시점도 이 장면들에 삽입되어 있다. 이런 장면 연출은 혹스의 연출 방식과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혹스는 종종 기능적인 감독으로 이야기된다. 테크닉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진행에 테크닉을 종속하는 작가라고. 그래서 혹스는 가장 비자의식적인 감독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월시의 경우는 반대로 고도로 숙련된 스타일과 기술성이 있다. 이것이 영화적 이야기를 위해 종속되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 반대의 경우다. 그런 점에서 월시는 고전기 감독 중에서 굉장히 특별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흥미로운 액션의 총체는 <젠틀맨 짐>에서 구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권투 경기 장면들에선 월시가 갖고 있는 장인적 기질이 얼마나 잘 표현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다. 그 어떤 권투경기 영화보다도 에너지가 넘치며 이상한 방식의 긴장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권투 경기에서 몸의 상체를 강조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반대로 배우의 발의 스텝이 강조된다. 인물의 성공은 경기에서의 현란한 발의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이런 움직임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정지의 이미지들이다. 스포츠클럽의 중심을 차지하는 조각상과 전설적인 권투선수의 포스터 앞에서 그가 취하는 자세들. 그는 조각상이나 포스터에 있는 인물이 되고 싶어 한다. 즉, 불변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고 싶어한다. 그것은 사실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경기는 일종의 전설과의 싸움이다. 신화적인 전설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 도달해 가는 것이다. 액션영화가 끝나는 것은 결국 움직임이 정지하게 될 때이다.
월시는 같은 시기의 감독들과 비교하자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립적인 인물을 그렸다. 포드나 혹스, 월시 이 세 사람은 미국영화를 만들었던 창안자들이면서 동시에 영화라는 것을 통해 미국을 만들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포드는 공동체의 집단성을 찬미했던 시인이었다. 혹스는 좀 더 작은 전문가들의 공동체 세계를 담아낸다. 월시의 영화에선 그런 집단적 공동체도, 전문가적 세계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자신의 이상을 추구해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밤에 달린다>에서 그들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 세계를 빠져나가려하기에, 그들의 곁에 누군가를 둘 수가 없다. 같이 보조를 맞추기도 어렵다. 혹스의 <리오 브라보>(1959)에서 세 남자가 보조를 맞추며 걸어가는 것과 같은 그런 걸음을 함께하기 어렵다. 월시적 세계의 인물이란 <거인>의 마지막에서 로버트 라이언이 클라크 게이블을 칭하며 하는 이런 대사에서 암시된다. “내가 존경했던 유일한 사람이 떠났다. 모든 소년이 자라서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자, 늙어서는 그렇게 못 산 것을 후회하는 사람.” 라울 월시의 영화에서 기억나는 이미지는 위태로운 세계의 벼랑 끝을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이다. 월시는 그들의 운명을 가장 강렬한 액션의 움직임 안에서 표현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리ㅣ 장지혜(관객 에디터)
사진ㅣ 김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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