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17. 14:12ㆍ시네아스트의 초상/라울 월쉬 - 할리우드 매버릭의 모헙
상영작 리뷰
주어진 상황을 돌파하는 적극적인 선택
- <검은 태양은 밝아온다>
거대 농장주의 딸로 어릴 적부터 기숙학교에서 교양과 교육을 받으며 ‘숙녀’로 자라난 맨티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인생의 대격변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의 외모는 전형적인 백인의 것이나 그녀의 어머니는 흑인 노예였고, 따라서 자신이 실은 흑백 혼혈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거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졸지에 노예상인에게 팔려가는 처지가 된다. 평생을 당연히 백인이라 믿으며 살아온 그녀가 느꼈을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에 대한 공포와 충격, 노예 경매대에 선 자신을 거액에 사간 대농장주 해미쉬 본드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 그가 자신을 노예가 아닌 ‘숙녀’로 대하는 데에 느끼는 놀라움과 당황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격하고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결국 그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이 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순간에 신세가 바뀐 불우한 젊은 여자와 부유하고 비밀을 지닌 신사 간 러브스토리에만 머무는 건 아니다. 영화의 원제 ‘Bands of Angels’는 원래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이 자신들을 가리키던 용어 중 하나다. 영화 중반 남북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영화는 크게 방향을 전환하는데, 여기서 해미쉬 본드의 오른팔이자 그가 아들처럼 키워온 흑인 대리인인 라루가 전면에 등장한다. 서른 살의 시드니 포이티어가 연기하는 라루는 지적이면서도 반항적이고, 일견 순종적이면서도 위압적이고, 정의로우면서도 비열함을 동시에 지닌 복잡한 내면의 캐릭터이고, 영화의 후반 뜻밖의 변곡점과 갈등, 위기를 제공하며 극을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라루를 통해 보여주는 역동성과 복잡성은 이 영화에 지속적으로 위험한 매력과 긴장, 자극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며 해미쉬와 맨티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노예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 이 영화는 인종문제나 노예제 등에 큰 관심은 없어 보인다. 이는 아무래도 라울 월쉬 감독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 같은 거창한 주제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에 놓이는 인물들의 도전과 모험을 더 중시한 탓인 것 같다. 말하자면 노예제와 남북전쟁은 세 남녀에게 인생의 풍랑과 격렬한 변화를 던져주기 위한 계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인물은 모두 최선을 다해, 그리고 각자의 가장 윤리적인 선택을 통해 자신에게 닥친 격렬한 삶의 변화를 헤쳐나가며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 플롯과 상황을 모두 뛰어넘어버리는 각 인물들의 스스럼없음과 적극적인 선택이 이 영화의 난폭한 매력과 개성을 만들어낸다.
김숙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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