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라울 월쉬가 그리는 낭만적인 영웅상 <거인>

2013. 4. 17. 14:12시네아스트의 초상/라울 월쉬 - 할리우드 매버릭의 모헙

상영작 리뷰

라울 월쉬가 그리는 낭만적인 영웅상 <거인>




<거인>은 라울 월쉬가 다양한 장르를 연출하는데 얼마나 뛰어난지, 그리고 그 개별 장르들을 한데 묶는 솜씨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확인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이다. 서부를 배경으로 한 이 낭만적인 모험극에는 도둑질로 살아가는 무법자와 인디언의 습격과 시네마스코프 화면 가득히 채워진 소떼, 그리고 왈가닥 여성과의 유머러스한 애정 다툼과 동료와의 우정-배신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다양한 장르적 코드가 한데 섞여 있는 것이다.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는 이 ‘종합 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서 라울 월쉬는 각 시퀀스 별로 능수능란하게 연출의 완급을 조절하며 개별 장르의 즐거움을 제대로 살린다. 특히 클라크 게이블과 제인 러셀이 눈보라 속 오두막에 단 둘이 갇혀 사랑을 느꼈다가 다시 등을 돌리며 끝나는 씬의 물 흐르듯 부드러운 연출은 단연 초반부의 백미다. 스크루볼 코미디 특유의 재치 있는 대사는 물론이며 시네마스코프의 화면비율이 남녀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후반부에 등장하는 화려한 스펙터클도 빼놓을 수 없다. 문자 그대로 화면 가득 소떼가 등장하는 이 장면에서 하워드 혹스의 <레드 리버>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 정서적 효과는 두 영화가 사뭇 다르다. 소떼를 몰고 거친 사막을 건너는 카우보이들의 고된 여정이 <레드 리버>에서는 서부극의 낭만적 신화를 의심하게 한다면 <거인>은 그 낭만성을 더욱 강화시키는데 쓰인다.

이토록 다양한 장르적 요소들이 등장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클라크 게이블의 캐릭터 변화이다. 그는 처음에는 사연 있는 ‘도둑’ 정도로 등장하지만 제인 러셀을 인디언의 습격으로부터 구해주고, 카우보이로서 리더쉽을 발휘하고 후반부에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통과하며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한다. 영화가 방점을 찍는 부분도 이 점이다. 다채로운 감수성을 지닌 장면들이 서로 다른 장르적 리듬으로 등장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은 결국 클라크 게이블의 캐릭터적 특성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귀결된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서부개척시대도 막을 내리는 19세기의 막바지에 클라크 게이블이 연기한 벤 앨리슨은 여전히 우아한 고전적 정취를 간직한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김보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