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는 여러 영화에 걸쳐 한 배우를 찍곤 했다. 재미있는 점은 각각의 영화들에서 그 인물들의 성격이 일관되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 배우가 자신의 성격과 맥락에서 조금씩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베아트리스 로망은 바로 그 대표적인 여배우이다. 그녀는 10대 때부터 그의 영화에 출연해 <아름다운 결혼>(1982)에서는 주인공 사빈느 역할을 맡았다. 로메르의 의뭉스러운 인물들 사이에서 가장 솔직하고 충동적인 이 아가씨는 자신감이 넘치고 자기의견에 굽힘이 없다. 오죽하면 <녹색광선>(1986)에서는 불쌍한 마리 리비에르를 몰아붙이다가 울리기까지 한다. (그러고는 사과도 하지 않는다!) 툭하면 싸우기 일쑤인 그녀는, 그러나 감정의 기복이 죄다 드러나서, 귀엽다. <아름다운 결혼>은 이 저돌적이며 총명하고 귀여운 여성이 결혼을 향해 돌진하다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그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



미술사 석사과정 중인 여학생 사빈느는 유부남 화가 시몽(페오도르 아트킨)과 사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걸려 온 가족전화에 그녀는 문득 이별을 결심하고 충동적으로 선언한다. “나 결혼 할 거야.” 마침 친구 클라리스(아리엘 동발)는 한 결혼식에서 사빈느에게 근사한 변호사 에드몽(앙드레 뒤솔리에)을 소개시켜주고 둘 사이에는 호감의 시선이 오가지만 일로 늘 바쁜 에드몽이 황급히 자리를 뜨며 별 소득 없이 만남은 마무리된다. 이후 어설픈 중매자 클라리스의 부추김과, 사빈느의 결혼에 대한 욕망, 에드몽의 우유부단한 상냥함이 엇갈리며 이야기는 대책 없이 흘러간다.



<아름다운 결혼>은 <해변의 폴린느>, <보름달이 뜨는 밤>, <녹색광선>등이 포함 된 ‘희극과 격언’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연작들은 대체로 정체불명의 결핍에 시달리는 현대 여성들의 방황기를 다루며, 그 결핍이 인물의 성격과 결합할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무슨 일이든 자신의 의지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빈느는 모든 해결책으로 '결혼'을 결심한 뒤 이를 밀어붙인다. 부정한 남자를 만난 과거에 대한 해결책도 결혼이며, 불만스런 현재 진로에 대한 해결책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해결책도 결혼이다. 이는 어쩌면 창조적인 작업을 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는 클라리스로부터 비롯된 욕망 같기도 하고, 실패한 결혼생활로 외도 중인 전 애인 시몬에 대한 복수처럼도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잘도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어가며 시대착오적으로 결혼에 매달린다. 



에릭 로메르의 인물들은 이처럼 알면서도 모르는 척 곧잘 욕망에 지고 만다. 그러고는 태연히 시치미 떼는 데 능숙하다. 그런데 이 시치미의 순간은 기만적이고 파렴치하기보단 오히려 산뜻하고 경쾌하며 때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삶에 대한 긍정이 이루어지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뭐, 아무렴 어때.' 사빈느는 에드몽에게 완벽히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조용히 미소 짓는다. 대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의 영화에서 이 같은 침묵의 순간은 흐르던 시간을 잠시 여울에 고여두는 재주가 있다. 그렇게 잠시 정지한 채, 제 삶을 응시하고, 실수를 깨닫고, 다시 살아나간다. 다행스러운 점은 로메르의 세계에서 실수가 꼭 우리 탓만은 아니며 그 불운만큼 행운의 우연도 도처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단촐한 세계가 우리 삶에 선사하는 풍성함이다. (백희원: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1월 25일(화) 16:30 에릭 로메르의 <아름다운 결혼>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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