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네오리얼리즘의 기수로 불리던 루키노 비스콘티는 50년대 무렵 멜로드라마에 심취하는데, 이런 경향은 말년에 이르러 탐미주의로 치닫는다. 이러한 비스콘티의 탐미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독일 3부작의 서두를 여는 작품이 바로 <저주받은 자들>이다. 특유의 멜로드라마 연출과 연극적 특징, 동성애적 성향과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 한 편의 대작에 농도 짙게 뒤엉켜있다. 나치가 차츰 그 세를 불려나가던 1933년 독일. 루르 지방의 세도가 요하임 폰 에센벡이 운영하는 철강회사는 나치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회사를 넘겨받은 SA의 일원 콘스탄틴, 진보적이고 반나치적인 아들 허버트와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촌 아셴바흐(헬무트 그리엠), 에센벡 철강을 관리하고 있는 프레드릭(더크 보가드)과 그의 연인 소피(잉그리드 툴린), 그리고 그녀의 아들 마틴(헬무트 베르거)은 각자의 욕망을 안고 골육상쟁을 벌인다.


비스콘티는 <레오파드>에서처럼 역사의 격변기에 놓인 거대 세도가의 파멸을 그려내는데, 여기서는 나치즘의 도래였다. 나치즘의 불꽃을 일으킨 것은 에센벡 가문의 권력과 돈이었지만 여기에 풀무질을 하는 것은 인물들의 사적 욕망이다. 프레드릭의 소피에 대한 욕망, 소피와 마틴 간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은 모든 인물을 파국으로 몰아간다. 그와 동시에 이 사적 욕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욕과 경계가 모호해지며 더 많은 인물들이 나치에 가담하도록 만들어간다. 마틴이 연인의 어린 딸과 마주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페도필리아는 소피로 인해 비뚤어진 그의 성적 욕망을 대변하고, 밤에 벌어지는 SA대원들의 남색의 향연은 영화 초반에 드러난 콘스탄틴의 동성애적 욕망과 이어진다. 이 모든 것들이 뒤엉킨 채 굴러가는 골육상쟁의 아수라에서 모든 욕망은 과장된 조명과 세트, 화려한 편집과 카메라 움직임으로 극도로 탐미적이고 아름답게 흘러넘친다. 그러나 이 모든 아름다움은 파멸로 향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그러하다.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철강회사의 용광로 위로 떠오르는 영화의 제목은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이 모두 일종의 지옥에서 허덕이리라는 것, 더 나아가 이들이 이미 모두 죽은 것과 다름없으리라는 것을 은유한다. 요하임의 생일파티에서 콘스탄틴의 아들 귄터가 첼로를 연주하는 순간 차례로 보이는 인물들의 얼굴은 흡사 데드마스크와 같으며, 바흐의 사라방드를 일종의 진혼곡처럼 들리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것이 타고 남은 폐허의 광경에 느리고 단호하게 경례를 붙이는 헬무트 베르거의 모습에는 피할 길 없이 도래하게 될 잔혹한 시대를 되돌아보는 비스콘티의 슬픔에 찬 시선이 있다. (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 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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