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18. 17:41ㆍ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20세기 버전의 ‘실낙원’
-데이비드 글래드웰의 '마을을 위한 레퀴엠'
데이비드 글래드웰은 영국 다큐멘터리의 오랜 조력자 중 한 명이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편집 등의 분야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다. 편집자로 참여한 작품 가운데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이프...>와, 린제이 앤더슨의 또 다른 작품 <오 럭키 맨>이 가장 유명하다. 회화를 전공한 그는 일찍이 1950년대 중반부터 중단편영화를 만들어왔으나, 다소 실험적인 성격의 다큐멘터리는 오랫동안 창고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영국 영화의 숨은 수작을 발굴하기 위해 꾸준히 애쓰는 BFI(영국영화협회)가 아니었다면, 그의 작품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몇 해 전, BFI는 글래드웰의 중단편을 복원해 세상에 공개했다. 수십 년 만에 무명의 감독이 재조명되는 순간이었다.
단편영화 때부터 주로 사라져가는 것을 소재로 삼아 실험적인 영상을 구사해온 글래드웰은 <마을을 위한 레퀴엠>에 이르러 이미지와 스타일 면에서 정점에 오른다. 글래드웰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떠나, 오랜 토양을 지닌 영국 다큐멘터리가 1970년대에 도달했던 낯선 경지를 확인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문자 그대로 죽은 자를 불러내 음악적으로 레퀴엠을, 문학적으로는 에세이를 써놓은 <마을을 위한 레퀴엠>은 동시대의 어떤 작품과도 비교를 불허한다(자유롭고 급진적인 경향의 요즘 다큐멘터리와 비교되어 마땅하다). 쇠락하는 문화와 사람에 애정을 표해온 글래드웰의 카메라는 현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서퍽(Suffolk)’ 지방을 찾는다. 마을의 묘지를 관리하는 노인은 죽은 자가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공공의) 선이 어떤 상상과 만나고 어떻게 시간을 견디느냐에 따라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꿈을, 다른 한편으로는 난폭한 꿈을 꾸게 된다는 것에 대해 영화는 말한다. 얼핏 ‘과거의 이상화’가 주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주제를 강요하기보다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만든다. 감독 특유의 슬로우모션과 편집으로 영국 전원의 사라져가는 풍경을 담은 <마을을 위한 레퀴엠>은 20세기 버전 ‘실낙원’이라 불릴 만하다.
글_이용철(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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