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눈 먼 사랑의 무한한 궤적

-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이터널 선샤인>의 첫 장면, 조엘(짐 캐리)이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천장에 매달린 모빌이다. 여느 때처럼 출근 준비를 하지만 그가 몸을 실은 것은 몬탁행 기차, 도착한 곳은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있는 몬탁의 한 바닷가다. 우연히 떠나오게 된 곳도, 살던 곳도 같았던 둘은 자연스레 연인의 길을 걷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집 앞에서 클레멘타인을 기다리고 있던 조엘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묻는다. “괜찮으세요? 도와드릴 일 없나요?” 이야기는 이렇듯 의미심장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야기가 흘러가고, 이제 다시 조엘의 눈에 비친 모빌이 화면에 등장한다. 비로소 영화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다. 조엘이 눈을 뜬 그 아침은, 이미 오래 전 연인이었던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운 후의 아침이었던 것이다. 영화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첫 이야기는 조엘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가는 기억들이 펼쳐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순으로 흘러가던 이야기는 이 장면에서 본래의 흐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첫 장면의 반복이지만, 이 두 번째 순간에는 문득 무너져가던 기억 속 클레멘타인의 마지막 속삭임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 — “몬탁에서 만나.” 결국 영화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던 것, 다시 말해 조엘을 다시 몬탁으로 이끈 것은 이 속삭임이었으리라.

 

그런데 이 도돌이표의 순간에 공드리는 하나의 결을 덧댄다. 기억을 지우는 회사인 라쿠나의 의사 하워드와 직원 메리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하워드에게 사랑을 고백한 메리는 자신에게도 기억을 지운 과거가 있음을 알게 되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녀는 곧 “너무 끔찍한 일이라 여러분의 파일을 돌려드립니다.”는 메시지와 함께, 노출이 금지된 녹음테이프를 고객들에게 돌려보낸다. 고객들의 삭제된 기억이 녹음된 테이프를 말이다.

 

사랑이 시작되려던 찰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이 테이프를 통해 서로의 기억을 듣는다. 그 순간까지는 설레는 새 사랑이었던 상대방이 이미 낡아버린 한 때의 연인이었다는 것, 관계의 파국이 둘을 이미 흔들어 놓았고, 그 파국을 극복하지 못해 기억을 지운 두 사람이 이렇게 다시 만났다는 것. 쌓아올리기도 전에 무너진 두 사람의 성. 이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던 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과거, 혹은 미래를 껴안고 가기로 한다.

 

두 사람의 이런 선택은, 언뜻 사랑의 ‘영원한 빛(Eternal sunshine)'에 대한 공드리의 찬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정된 곳으로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비장한 아름다움을 읽기란 어렵다. 그들이 이미 둘의 결말을 ‘체험된 형태’로 목격해버린 것이 메리에 의한 우연, 그것도 조금 비윤리적이기까지 한 우연 때문인 까닭이다. 두 사람이 감수하기로 한 진실은 바로 이 우연으로 인해 폭로된 진실이다. 이는 픽션에 성공적으로 감동을 부여하지만, 동시에 <이터널 선샤인>이 어색한 방식으로 세상의 질서에 눈을 감는 태도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흘러간 물에 다시 손을 담글 수 없다는 싸늘한 세상의 질서에 눈을 감으니 영화 속 ‘현재’는 과거와도, 미래와도 봉합 되어 무한한 궤적을 그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사랑의 축복이라 해도 좋겠지만, 비틀어진 방식으로 체념된 미래가 여전히 그 사랑의 틈 속에 있다.

 

김경민 /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