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새로운 윤리를 예고하는 육체적 열망 -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

2013. 1. 25. 15:37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새로운 윤리를 예고하는 육체적 열망

-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

 

 

마스무라 야스조는 살아있는 동안 ‘작가’라는 직함을 얻지 못했다. 동시대 작가이던 오시마 나기사, 스승이던 이치가와 곤마저 스튜디오를 떠나던 때에 마스무라 야스조는 영화사 다이에이가 1971년에 도산하기 직전까지 스튜디오 제도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바뀌어 그의 영화들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시점부터이다.

 

생전에 작가로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마스무라 야스조는 평생 동안 비교적 일관된 주제들을 다루어 왔다. 스크린 속에서 구현되는 육체, 그 육체를 감싸고도는 (지나친) 욕망, 공동체의 속박적인 윤리를 뚫고 나가려는 개인들의 공모 등이 이에 해당한다. 1965년 작 <세이사쿠의 아내>에서도 특유의 주제의식이 뚜렷하다. 오카네가 늙은 갑부의 정부였던 사연을 속전속결로 보여주는 도입부와 함께 오프닝 시퀀스가 맞물려 끝나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쟁에서 돌아온 세이사쿠는 자진하여 아침마다 새벽종을 치는 마을의 ‘모범인’이 된다. 오카네만이 이 종소리에 따라 일과를 시작하지 않는 왕따가 되지만, 홀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오카네와 세이사쿠는 격렬한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다. 볏짚 위에서, 숲 속에서 일찌감치 육체의 합일을 이룬 둘의 관계는 서로의 몸을 파고들면서 점점 더 깊어진다. 이들에게 있어 사랑은 상대의 육체에 대한 욕망과 등가이다. 오카네의 “내가 유일하게 욕망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이다… 당신의 몸은 내 것이다”라는 대사는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를 관통한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인장은 ‘육체’라는 소재뿐 아니라 그것을 극한의 지점으로 끌고 가는 방식에 새겨져 있다. 그 방식이 <아내는 고백한다>에서는 생사를 건 이중택일의 문제로, <만지>에서는 세 남녀의 집단자살로서 나타났다면, <세이사쿠의 아내>에서는 직접적인 육체의 훼손으로 드러난다. 오카네가 세이사쿠를 또다시 전장에 보내지 않기 위해 못으로 눈을 찌르는 지점에서부터 애정의 대상이던 육체는 훼손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 마을 남자들은 도망가는 오카네를 붙잡아 사지를 붙들고 구타한다. 이에 마찬가지로 사지를 붙들린 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세이사쿠의 모습이 연결된다. 세이사쿠는 눈을 잃음으로써 자의적으로, 타의적으로 자신을 옥죄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다. 명예도, 신념도, 사랑하는 이를 보는 쾌락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오카네는 여전히 관음적인 시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카메라의 시선이 버둥거리는 오카네의 하얀 맨 다리로 옮겨갈 때, 그 프레임 안에는 (마을 남자들의) 폭력으로 인한 쾌락과 성적인 쾌락이 동시에 점유하고 있다.

 

비극으로 곤두박질치던 두 사람의 운명은 밑바닥에서 다시 앞으로 기어나간다. 세이사쿠는 ‘시선’을 잃은 자리에 연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는 고독과 타인의 괄시라는 이중구속이 얼마나 오카네를 힘들게 했는지를 깨닫는다. 눈은 세상을 향해 나 있는 마음의 창이라고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 많은 타인의 잣대가 기웃거리는 감시창이었던 것이다. 둘은 이 창문을 닫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온전히 ‘몸’으로만 한 사람을 껴안고 살아가기로 한다. 두 개인이 육체의 합일을 넘어 관념의 합일을 이루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예견하는 것은 반복되는 사회적 고독이 아니라, 이전 세계에는 없던 작은 유토피아의 생성이다.

 

지유진 /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