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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고통과 고독의 외설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는 그 명성과 제목, 널리 알려진 주제곡 선율로 제법 낭만적인 사랑영화로 오해 받을 만하다. 배우들의 면면과 비토리오 스트라로의 콘트라스트 짙은 유려한 화면도 이에 한 몫 한다. 그러나 이 근사한 외피 속에 펼쳐지는 관계들은 조금도 낭만적이지 않다. 인물들은 거의 결핍에 의해서 움직이며 번지수를 잘못 찾아 자꾸 엇갈린다. 개봉당시 외설 논란을 일으키며 유명해진 정사장면들은 둘의 결합이라기보다 충돌에 가깝다. 카메라는 멀리서 이를 차갑게 바라보거나, 고통의 표정에 다가갈 뿐이다. 사랑의 밀어 대신 욕설과 사회시스템을 부정하는 말들이 튀어나온다. 제일 다정한 언어는 그르렁대는 동물소리. 이 영화에서 가장 낭만적이라 할 만한 것은 사랑은 커녕 차라리 죽음과 고독일 것이다.



영화는 중년 남자 폴(말론 브란도)이 내뱉는 절규 내지는 고함으로 시작한다. 이 때 모자에 꽃을 단 어린 여자, 잔느(마리아 슈나이더)가 발랄한 걸음으로 힐끗, 그를 스친다. 잠시 후 두 남녀는 세 놓인 빈 아파트에서 만나 충동적인 섹스를 나눈다. 그 후 폴은 아내의 자살 현장으로, 잔느는 약혼자 톰(장 피에르 레오)이 도착하는 기차역으로 제 갈 길을 간다. 이후 폴과 잔느 각자의 삶이 교대로 진행되는 사이사이 두 남녀는 환하고 살풍경한 아파트에서의 정사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여기서 두 삶, 두 관계는 불협화음의 돌림노래를 맞춘다. 이를테면 영화감독인 톰이 잔느를 영화주인공으로 삼고 그녀의 역사를 원할 때, 막상 그녀가 가장 내밀한 기억을 털어놓는 대상은 폴이다. 그러나 폴은 이를 거부한다. 그가 바라는 관계는 지금, 여기 뿐. 어떤 무게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잔느와의 가학적인 섹스를 통해 아내의 자살과 외도라는 현실로부터 도피한다. 그런 폴에게 현실의 사랑을 원하고 거부당하는 잔느가 "내 영혼을 강간당하는데 지쳤어"라 외치며 상처를 드러내는 대상은 또 톰이다. 폴은 잔느에게 던졌던 모욕의 말들을 아내의 시신 앞에 돌아와 다시 뱉어내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엇갈리는 감정들은 결국 폴과 잔느의 관계를 파국으로 이끈다. 영화 중반, 그의 신분을 밝히려는 잔느에게 폴은 ‘그걸 알게 되면 곧 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의 끝은 바로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에 어긋난다. 잔느가 폴의 부재를 비로소 받아들이자, 마침내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인 폴이 잔느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과 상황을 밝히기 시작한다. 끝이다. 폴은 새로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익명에서 벗어나 현실의 실체로써 이름과 무게를 갖는 순간, 둘 사이의 가학적인 관계는 그 무게만큼 잔느를 억압하게 되며, 고로 더 이상 사랑 아닌 폭력이 된다. 이는 끝내 잔느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몬다.



본래 베르톨루치가 염두에 두었던 남녀 주인공은 전작 <순응자>(1970)의 장 루이 트랭티냥과 도미니크 산다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가장 깊이 남는 것은 브란도의 그늘 짙은 얼굴이 풍기는 고독의 인상이다. 하지만 촬영 후 그가 영화에서 모욕감을 느꼈다며 “두 번 다시 이런 영화는 찍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슈나이더 역시 훗날 “브란도와 베르톨루치에게 강간당하는 느낌이었다”며 출연에 대한 후회를 토로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배우들이 실제 몸소 겪어낸 고통은 완벽한 음악과 촬영으로 경이적으로 근사하게 스크린에 펼쳐진다. 미처 여기선 다루지 못한 정치적 함의까지 띤 채, 그렇게 외설은 예술이 되고, 고통은 고전이 됐다.(백희원: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