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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비극적 역사에서 희망의 기운을 읽는 방법 -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칠레전투>

리뷰

비극적 역사에서 희망의 기운을 읽는 방법

-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칠레전투>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칠레의 대통령궁에 무차별 폭격이 가해진다.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그곳에서 사회주의 민중연합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끄는 반동적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 <칠레전투: 비무장 민중의 투쟁>은 거기서 시작한다. 영화는 1970년 세계 최초로 민주적 선거로 사회주의 정부를 건설하는데 성공한 칠레가 이후 기나긴 군부정권의 암흑으로 걸어 들어가기까지 그 3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아옌데 정부의 지원 아래 파트리시오 구즈만과 네 명의 영화청년들이 칠레 현대사의 혁명적 시기를 기록하기 시작한 때는 아옌데 정권의 사회개혁 프로그램이 이미 완수된 1972년 말이었다. 그들은 16mm 카메라와 녹음기 한 대와 흑백필름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거기서 수많은 민중들을 만났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후 칠레는 내전의 기운에 휩싸였고 결국 촬영 9개월 만에 아옌데 정권은 무력으로 무너졌고 영화작업도 거기서 끝이 났다. 그 과정에서 두 명의 촬영감독이 죽었고, 구즈만과 살아남은 동료들은 쿠바로 망명하였다. 이후 6개월에 걸쳐 해외로 밀반출된 필름이 4시간 45분에 걸친 장대한 기록물인 <칠레전투> 3부작으로 완성되기까지는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민중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동자들의 숭고한 꿈이 실패로 돌아가는 이 과정은 어찌 말해도 비극이지만 구즈만은 그것을 결말로 삼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다. 아옌데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아르헨티나 촬영감독의 죽음으로 끝나는 1부 <부르주아지의 봉기>가 73년 국회의원 선거를 전후로 한 맑시스트와 파시스트의 첨예한 대립을 다루었다면, 2부 <쿠데타>는 합법적으로는 아옌데를 제거할 수 없어지자 미국의 지원 하에 쿠데타를 시도하는 우파의 전략을 중심에 두었다. 그렇다면 우파 파시스트들이 그토록 두려워한 그 세상은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을까? 3부 <민중의 힘>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세상이 노동자들의 손에 의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민중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영웅을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영웅이 된다. 기나긴 편집을 거쳐 3부작이 변증법적으로 구조화되는 것은 이런 방식을 통해서이다.

 

1부에서 우리를 향해 겨눠진 총구에 카메라맨이 쓰러지는 장면은 충격적이며, 2부의 마지막에 "민중의 신뢰에 목숨으로 보답하겠다"는 아옌데의 마지막 육성은 강렬한 비극적 정조를 남기지만, 내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3부에서 목제를 한가득 실은 리어카를 끄는 젊은 노동자의 발걸음을 담은 장면이었다. 바퀴보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그의 발은 마치 하늘을 나는 듯했다.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입니다. 계속 투쟁합시다, 동지들!" 이 장대한 영화는 역사의 실패에서 새로운 혁명의 싹을 틔우며 끝을 맺는다.

 

강소원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