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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 최호적시광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호남호녀> 리뷰 - 현재와 과거, 그리고 역사와 개인의 감정을 겹쳐서 만든 영화

현재와 과거, 그리고 역사와 개인의 감정을 겹쳐서 만든 영화

- <호남호녀>





<호남호녀>를 두고 혹자는 허우 샤오시엔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가장 실험적인 작품이라 평한다. 실험적이라 평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영화가 여러 겹의 시간대를 비슷하게 겹쳐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시간대를 겹쳐 놓는 것이 아니라 실제와 그것의 재연이 겹쳐지며, 인물(리앙 칭)의 과거와 현재가 겹쳐든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은 재연이요, 이것은 실제요.’ 혹은 ‘이것은 과거요, 저것은 현재’라는 식의 구분점을 영화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처음에 영화는 그저 서로 다른 시공간과 인물을 나열하는 것처럼 보인다. 리앙 칭을 제외하고 인물들의 얼굴도 잘 구분되지 않는다. 롱숏으로 잡히거나 어두운 배경에 놓인 인물들을 분간하기란 쉽지 않다. 인물과 시간을 분리하는 것은 애초에 영화가 의도한 바가 아닌 것 같다. 영화의 제목이 주는 분리되면서도 서로 겹쳐지는 이미지가 영화 전체에 녹아든다. 때로 겹쳐짐은 리앙 칭이 과거에 쓴 일기가 리앙 칭의 언니에게 팩스로 전달되면서 일어나는 혼재된 시간처럼 느닷없이 일어난다.


겹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겹쳐지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이다. 특히 리앙 칭과 치앙 비유의 겹쳐짐이 중요해 보인다. 혹자는 <호남호녀>에서 과거(치앙 비유)와 현재(리앙 칭)가 겹치면서 현재가 과거에 일상성을 불어넣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일상성은 오해될 소지가 큰 말이다. 여기에서의 일상성은 김빠지고 반복된 행위로 점철된 것으로서의 일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것보다 강렬하고 때로는 졸렬하기까지 한 것으로서의 일상이다. 영화에서 가장 격렬한 사건과 감정의 순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리앙 칭과 아 웨이가 만들어 낸다. 청 하오퉁과 치앙 비유가 반군에 합류하기 위해 대만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뒤의 상황은 실제 사건이 주는 강렬함에 비해 건조하게 묘사된다.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심문을 받은 뒤 구금된다. 이후 이들은 비정상성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리앙 칭과 아 웨이의 관계는 얼핏 청 하오퉁과 치앙 비유가 겪은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둘 간의 격차가 오히려 둘 간의 연결점을 만든다.





리앙 칭이 정말 치앙 비유의 삶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은 그녀가 치앙 비유를 연기하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연기하지 않는 순간들이다. 이를테면 리앙 칭이 배드민턴을 치다가 휘말리는 마구잡이 싸움의 볼품없는, 그러나 그것이 주는 격렬함이 치앙 비유가 살던 시기에 숨겨질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필시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을 감정의 격렬함과 졸렬한 일상 같은 것을 상상해보게 한다. 그것은 아마 역사를 재연하면서는 담길 수 없는 것들이고 재연을 비껴가야지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거대하기보다는 치졸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겹쳐 놓는 프레임을 통과해야지만, 밑바닥을 구르는 치졸한 몸짓들이 구제되고 반대로 역사에 포획된 인간의 감정이 숨 쉴 틈을 얻는다. 그러나 겹쳐짐은 두 개의 사건을 구분 불가능하게 포개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격차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치앙 비유를 위해 만든 이 영화가 결국 치앙 비유에게 가닿지 못하면서 끝내 두 개의 시간은 이음매를 만들지 못한다. 그 격차가 ‘너무 늦었다’는 운명적인 감정을 만들어낸다. 둘 간의 긴장 속에서 일상과 운명 사이에 내내 진동하는 인간이 보인다.

김소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