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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서울아트시네마 개관 9주년 기념 영화제

[리뷰] 스파이크 존즈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 Where the Wild Things Are'


모리스 샌닥의 동명 그림책을 영화화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2009)는 제작 단계부터 악소문에 시달린 영화였다. 그것은 모두 연출자인 스파이크 존즈 감독에 대한 것이었다. 원작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바꿔 모리스 샌닥을 분노케 했다는 얘기부터 너무 난해하게 찍은 까닭에 제작자가 직접 편집에 나섰다는 소식까지. 일단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관련한 오해부터 풀자면, 스파이크 존즈를 연출자로 결정하는데 가장 목소리를 높인 인물은 바로 모리스 샌닥이다. 샌닥은 오래전부터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실사 영화를 기획해왔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과거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데 이에 실망한 샌닥은 괴물의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실사가 낫다고 판단했다. 단, 실사 화면에 CG로 처리하는 것이 아닌 라이브 액션이어야만 했다. 샌닥의 기획 의도처럼 스파이크 존즈 역시 애니메이션을 주장하는 제작사에 맞서 실사를 주장하며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성을 이루었다.

영화화된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스파이크 존즈의 색깔이 원작의 아우라를 뛰어넘는다. 수공업적인 형태의 제작 방식, 즉 사람이 괴물의 탈을 쓰고 연기함으로써 풍겨나는 인간적인 따뜻함은 이 영화의 핵심 정서라 할만하다. 스파이크 존즈가 거대한 인형의 형태로 구현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자연스러울까 걱정의 시선이 없었던 게 아니다. (바로 그 이유가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감독에 대한 악소문을 키운 발단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탈을 쓰고, 여기에 미세한 표정과 행동을 CG로 더해 되살려낸 괴물의 실체는 실제 존재한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스파이크 존즈가 죽어도 라이브액션을 고집한 이유를 알만한 대목이다.

원작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장난이 심해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고 방에 갇힌 맥스(맥스 레코즈)가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갔다 와 보니 따뜻한 밥이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 전부다. 간단한 원작의 이야기와 샌닥이 그린 20장 정도의 그림을 토대로 101분의 상영시간을 채우는 건 순전히 맥스와 괴물간의 소통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다. 맥스와 괴물 모두 친구가 된 기쁨에 못 이겨 숲을 파괴하고, 놀이를 한답시고 일부러 나무에 생채기를 내며, 피곤에 못 이겨 잠을 잔다는 것이 탑을 쌓듯 서로 뒤엉키는 등 이건 아이들의 감수성이 아니면 도저히 구현 불가능한 디테일이다. (안 그래도 <존 말코비치 되기>(1999)와 <어댑테이션>(2002) 등은 모두 아이들처럼 자기만의 동굴 속에 갇혀 놀기 좋아하고 상상하기 좋아하는 소유자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궁극적으로 아동을 타깃삼은 가족영화다. 다만 할리우드가 부러운 이유 중 하나는 가족용이라고 해서 절대 어른들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주요한 이미지는 바로 ‘동굴’이다. 이 이미지는 맥스가 계속해서 자기만의 요새 속으로 숨어드는 심정을 대변한다.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맥스나 그들만의 섬에 갇혀 사는 괴물은 어떤 면에서 소외된 자와 닮았다. 그들이 동굴처럼 좁은 곳으로 몸을 숨기는 이유는 고립을 강조해 역설적으로 같이 놀아달라는 항의의 성격을 지닌다. 다른 한 편으로는 소외된 자들끼리 그들만의 이상향을 건설해 고립의 벽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의미도 내포한다. 그래서 맥스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도 괴물들과 함께 그들만의 요새를 건설하려하지만 이는 최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 대신 맥스는 계획을 철회하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와 화해하기에 이른다.

스파이크 존즈는 항상 고립된 자들의 이야기를 즐겨 다뤄왔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크레이그 슈와츠(존 쿠삭)와 로테 슈와츠(카메론 디아즈)는 부부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심적 공허감으로 외로운 인물들이었고 <어댑테이션>의 찰리 카우프먼(니콜라스 케이지)은 대중들이 알아봐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열 증세를 겪는 무명작가였다. 결코 많지 않은 작품이지만 스파이크 존즈의 필모그래프를 관통하는 주제는 일관됐다. 소수자들에게는 더 큰 세상으로 나오라는 격려이고 다수자들에게는 소수자에게 좀 더 손을 뻗어줄 것을 호소하는 목소리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도 다르지 않다. 자기 안팎의 고립을 뛰어넘어 서로 소통하자는 주제를 설파한다. 가족 해체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이는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유효한 메시지인 것이다.

글/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