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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서울아트시네마 개관 9주년 기념 영화제

[리뷰] 시드니 루멧의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이하 ‘<악마가>’)는 두 가지 이유로 기억할만한 영화이다. 최근 작고한 시드니 루멧의 유작이라는 사실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 명철한 이야기꾼 감독이 현대적 내레이션 방식을 통해 스토리텔링을 다루는 능숙한 솜씨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는 점이 두 번째이다. <악마가>는 멀티플 캐릭터의 시점으로 재구성된 비선형 복합 내러티브 방식의 이야기이다. 내러티브는 각자의 삶에서 궁지에 몰린 앤디(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와 행크(에단 호크) 형제가 모의한 보석상 강도의 날을 중심으로 앞과 뒤의 시간들이 조금씩 살을 붙여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빚에 찌들어 있고 건사해야 할 아이가 있는 행크, 가족과 일터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앤디는 강퍅한 삶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피안의 세계를 찾아 부모님의 보석상을 털기로 한다. “여드름 짜는 것처럼 간단한”줄 알았던 거사가 틀어지기 시작하면서 뒤늦게 이를 수습하려는 형제의 좌충우돌은 점입가경이 되어간다.

<악마가>는 신문 사회면에 실릴법한 사건을 영화로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시드니 루멧의 장기가 제대로 드러난 영화이다.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1989)을 연상시키는 최상급의 강도 스릴러인 동시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도록 만드는 긴장과 서스펜스는 <형사 써피코>(1973) <개 같은 날의 오후>(1975) 같은 루멧의 전성기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켈리 매스터슨의 예리한 각본은 매사가 한심하고 절망적인,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모님의 가게를 터는 자식들, 세상살이의 황폐함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형 앤디, 형수와 바람 난 시동생 행크, 가족의 죽음을 빌미로 행크를 협박하는 남자, 세상은 사악한 곳이라고 주문을 외듯 읊조리는 장물아비가 주체할 수 없이 무너져가는 세계의 내면을 스케치한다. 보석상 강탈이라는 중심 사건을 축으로 시간을 재배열하는 내레이션은 사건의 반복과 이야기의 틈새를 조금씩 메워가면서 깊어지는 이야기 방식을 택함으로써 파멸의 무드를 점진적으로 상승시켜 간다.



시간과 인물이라는 벡터를 통한 조각난 사건들의 종합으로 거대한 스토리의 맥락을 재구성하는 현대적 스토리텔링의 트렌드를 수용한 <악마가>는 그러나 부분들의 단순 종합 이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라는 제목 앞에는 ‘아마 당신은 30분 간 천국에 있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생략되어 있다. 애석한 것은 우리가 천국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짧고 달콤한 천국이 지나간 뒤 길고 황막한 지옥이 계속된다면? 시드니 루멧의 기념비들이 항시 그랬던 것처럼 <악마가>에서도 좌중의 호흡을 장악하는 배우들의 앙상블이 빛을 발한다. 냉정과 흥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앤디, 특유의 유약함으로 행크의 여린 내면을 묘사하는 에단 호크, 자애로움과 완악함을 한 몸에 담은 부조리한 가부장 알버트 피니의 존재감도 잊을 수 없다. 특별히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연기하는 앤디는 모호하며 비밀스러운 인물인데,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그의 절규에서는 소외와 소통불능을 남모르게 견뎌 온 절망감이 정밀하게 읽혀진다.



<악마가>는 악행의 자기 복제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더욱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한 부도덕한 형제의 범죄로부터 확산되는 부조리한 악행은 온 세계를 음울하게 물들인다. 평범한 가족의 삶을 패륜과 범죄의 수렁으로 인도하는 이 음울한 암각화는 하나의 행위와 감정을 낳은 다채로운 맥락을 탐사하는 다중적 심리 드라마이고 미국적 삶의 근간이라 할 가족의 붕괴를 다룬 가족 드라마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고 물화된 삶에 대한 비판이 주조음을 이루는 사회 드라마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청색 톤의 이미지는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무간 지옥으로 이 세계를 묘사한다. 무엇보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 세상에 대한 적의를 거두지 않았던 반골 감독 시드니 루멧이 마지막 순간까지 탄력적으로 현실을 읽어 내고 그에 부합하는 적확한 이야기의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글/ 장병원(서울가족영상축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