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에서 한 소년이 발견된다. 10세 전후로 보이는 이 소년은 인간 사회가 아닌 야생에서 살아온 ‘야생의 아이’였다. 후에 빅토르로 명명된 이 소년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빅토르는 정신병원에서 농아학교로 그리고 이타르 박사의 개인 집으로 보내진다. 장 이타르 박사는 1798년, 소년의 지적장애가 선천적인 것이 아닌 인간사회와의 단절과 고립에 근거했다고 주장하며 빅토르의 교육을 전담하게 된다.

 

실화에 근거한 이 이야기는 트뤼포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주인공인 빅토르를 비롯한 배역들의 캐스팅이 마무리되었고 또 한명의 주인공인 이타르 박사의 역할이 남았는데, 이는 트뤼포가 직접 연기했다. 이 영화의 흑백 화면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재의 구현에 성실성을 제공하고, 시퀀스를 아우르는 고전적인 기법인 아이리스의 열림과 닫힘은 주제에 대한 ‘특권적인 순간’에 집중력을 부여한다. 빅토르가 교육을 받을 때마다 배치된 화면 중앙의 숲을 향한 거대한 창은 심도를 깊게 만들어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 위치한 빅토르를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이타르를 직접 연기한 트뤼포는 이 모두를 안정감 있게 아우르며 자신의 메시지를 차분하게 전달한다.

 

내용과 형식에서 한 편의 다큐를 보는 인상을 받지만 어느 극영화 못지않게 몰입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비단 차분한 톤을 기반으로 잘 짜인 신속한 장면 구성 및 전환 때문만은 아닌 영화의 본질적 화두 때문이다. 야생과 문명,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질문은 고루하며 답이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빅토르가 어떤 이유로 야생에 버려졌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연민을 동시에 갖는다. 이는 야생의 소년을 당연히 구조되어야 할, 교육을 통해 교정되어야 할 존재로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전제는 인간은 동물과 다르며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타르 박사의 집에 머물며 안전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된 빅토르는 늘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숲 속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점차 교육을 통해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 가지만 자연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힘들며, 결국 집을 나와 자연으로 돌아간다.

 

인류는 지성이라 포장된 우월한 지능을 통해 자연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었고, 문명을 발달시키고 자연을 대상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육체가 편할수록 물질이 풍요로울수록 정신은 빈곤해지고 정서는 안정을 갈구한다. 다시 자연을 찾게 되지만 이미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인데, 결국 인간은 일종의 대안으로 자연의 흔적을 다른 인간을 통해서 찾으려고 한다. 즉, 인간은 타자와의 교감을 통해 자연에 대한 막연한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는 것이다. 빅토르에게 이타르 박사와 게렝부인은 타자였다. 이타르는 자연을 갈구하는 빅토르를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지성을 통해 빅토르를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고집스럽게 인도한다. 트뤼포 자신의 평생에 걸친 영화작업에 대한 신념을 이타르에 투사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김준완: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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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트뤼포의 1967년작 <비련의 신부(원제는 검은 옷을 입은 신부La Mariee Etait En Noir)>는 미국의 작가 코넬 울리치(윌리엄 아이리시)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결혼식에서 남편을 잃은 신부가 남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 살해함으로써 복수를 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코넬 울리치는 1930~40년대 주로 활동한 추리 소설가로 누아르의 아버지로 불린다. 트뤼포는 코넬 울리치의 소설을 읽고 즉시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가 존경한 감독인 알프레드 히치콕은 1954년에 이미 울리치의 소설을 영화화하여 <이창Real Window>를 만들었다. 트뤼포는 울리치의 블랙 시리즈(Black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소설들) 중 두 편을 영화화했는데, 1940년에 출간된 『검은 옷을 입은 신부The Bride Wore Black』와 후에 <미시시피의 인어La Sirene Du Mississipi>의 원작이 되는 1947년의 『어둠 속의 왈츠Waltz into Darkness』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잔 모로(극중 줄리)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검은 옷을 입은 그녀는 창문에서 뛰어 내려 죽으려고 하지만 어머니에게 저지 당한다. 그리고 여행 가방에 옷가지들을 챙기기 시작한다. 그녀가 가방에 차곡차곡 포개어 넣는 옷들은 모두 검은 색과 흰 색. 이후 등장하게 될 그녀의 의상들이다. 그녀는 검고 흰 아름다운 옷을 몸에 걸치고 그녀의 남편을 죽게 만든 다섯 남자를 찾기 시작한다. 그녀의 수첩에는 그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리고 한 명씩 그들을 찾아 내어 죽일 때마다 그 이름들을 지워 나간다. 그녀의 목표는 다섯 개의 이름을 모두 지우는 것이다.

 

트뤼포는 원작에 충실한 237페이지의 각본을 썼다. 등장 인물의 이름과 그들이 죽는 방식은 원작과 영화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트뤼포는 원작의 반전이 있는 결말을 대폭 수정하여 소설 속에서 신부인 줄리를 추적하는 탐정의 역할을 거의 삭제했다. 대신 복수 과정 그 자체, 즉 차질 없이 살인을 하기 위해 꼼꼼히 준비하고 모든 것을 쏟아 붇는 여주인공의 모습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트뤼포가 코넬 울리치의 소설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울리치의 작품은 다른 추리 소설들과 달리 탐정의 역할이 축소되고 반영웅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트뤼포는 울리치에 대한 글에서 그의 인물들에 대해 미국적인 영웅과는 정반대라고 썼다. 그의 삶과 영화 안에서 영웅적 용기는 항상 기지나 재치보다 높게 평가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에게 반감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원작보다 더 나아가 아예 탐정의 역할을 하는 형사의 존재를 지우고 비련의 신부가 벌이는 복수극을 완성시킬 수 있는 각본을 썼다. 그가 원한 것은 어떤 영웅적 의식도 없이 순수하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이었다.

 

수정된 각본에 따라 여주인공을 맡은 잔 모로의 역할은 막중했다. 초점은 온전히 여주인공에게로 옮겨 갔다. 트뤼포는 감정적이고 선악에 고뇌하는 인물이 아니라 강박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을 원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죽어가는 남자 주위로 만돌린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잔 모로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하다. 그녀는 복수를 위해 기꺼이 유혹하고 새로운 인물을 창조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인물을 연기한다. 살인은 하나의 연극처럼 그녀의 연출에 따라 차근차근 진행되는데 때때로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기도 한다. 그런 순간들에서 트뤼포는 주인공이 기지와 재치, 그리고 태연한 즉흥 연기를 통해 상황을 헤쳐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트뤼포의 기지였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비련의 신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한 남자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 이내 배경 음악으로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복수가 끝날 때까지 비련의 신부에게 결혼식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손소담: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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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는 <이웃집 여인>에 이어 다음 작품에서도 파니 아르당을 여주인공으로 내세우기로 결심한다. 트뤼포는 특히 <이웃집 여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의 외모가 ‘필름 느와르’의 여주인공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신나는 일요일>의 주된 틀은 히치콕 풍의 스릴러이다. 이중의 살인 혐의를 받게 되어 자신의 사무실에 숨어있게 된 한 남자(장 루이 트랭티냥)가 있다. 자신의 결백을 밝혀내기 위해 직접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심하는데, 여기에 그의 비서(파니 아르당)가 동참한다. 공간에 고립된 남자와 직접 상황 안으로 뛰어 들어가 증거를 찾아내는 여자의 설정은 히치콕의 <이창>을 떠올리게 한다. 트뤼포는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플롯 자체보다, 과거의 미국영화들, 필름 누아르나 갱스터 영화, 탐정물, 코미디의 분위기를 되살리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조명과 세트, 의상, 소품 등은 흑백촬영을 위해 특별히 공을 들였고, 음악 또한 ‘<빅 슬립> 같은 워너 브라더스 스타일’을 주문했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와 함께 이를 이끌어가는 빠른 리듬과 활기가 영화의 주를 이룬다.

 

오프닝에는 밝은 음악과 함께 경쾌하게 거리를 걷는 파니 아르당의 모습이 등장한다. 곧이어 사냥터에서 벌어진 최초의 살인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범인의 모습은 부분적으로만 나타나고, 갑작스런 총격과 함께 한 남자가 얼굴 전체에 피가 튄 채 쓰러진다. 마찬가지로 예기치 않던 순간에 파니 아르당이 뺨을 맞는 장면에서처럼, 급변의 순간들이 영화 곳곳에 존재하고, 불균질한 요소들이 빠른 호흡의 리듬으로 연결돼 특유의 유희성을 강조한다. 덕분에 <신나는 일요일>의 시간과 사건은 현실의 것과는 별개의 논리로 진행된다. 시간과 공간은 물론 날씨마저도 그러하다(파니 아르당이 조사를 위해 사무실을 나설 때 쏟아지던 장대비는 그녀가 차를 바꿔 타자마자 그쳐버린다!).

 

영화의 초반에는 전혀 호감을 갖고 있지 않던 두 남녀가 어느덧 공모의 관계로 바뀌어가더니, 결국에는 남자의 결백의 입증하는 것과 동시에 결혼에 도달한다. ‘긴 토요일 밤’(찰스 윌리엄스의 원작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을 지나 해피 엔딩으로 맞는 ‘신나는 일요일’인 것이다. 영화 내내 살인 사건을 쫓아 주인공을 돌며 사진을 찍던 사진 기자는 영화의 엔딩에선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던 중 실수로 떨어뜨린 카메라의 조리개가 아이들 앞으로 굴러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아이들이 공을 차며 놀 듯 조리개를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레 카메라와 유희, 유희로서의 영화를 상기시킨다.

 

한편 배우들의 연기 또한 플롯의 설득력과 영화의 엉뚱하고 유쾌한 매력을 더한다. 특히 파니 아르당이 연기하는 ‘바바라’는 평소 취미 삼아 하던 연극 연습에서 불만을 느끼게 되고, 때마침 경찰에 쫓기고 있던 자신의 상사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녀는 아마추어 탐정이라는, 자신의 새로운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면서 호기심과 흥분을 감추지 않는다. 실마리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파니 아르당의 모습은, 그런 ‘바바라’의 모습을 생기있게 그려낸다.

 

 1983년, 영화를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뤼포는 뇌종양 진단을 받게 된다. 결국 이듬해인 1984년 가을, 트뤼포는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그가 계획했던 몇 가지 기획들은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예기치 않게 그의 유작이 되었지만, <신나는 일요일>은 늘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들과 배우에 대한 예찬을 멈추지 않았던 그다운 작별인사로 남게 되었다.(장지혜: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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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시네마테크 오픈토크

 

 

 

 

 

 

서울아트시네마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시네마테크 오픈토크’의 두 번째 시간은 영화 감독들의 내밀한 삶에 관한 것입니다. 영화촬영 현장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우리가 극장에서 보는 영화들이 어떻게 이런 무질서한 현장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지 의아해하곤 합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아메리카의 밤>에서 그런 영화촬영 현장의 내막을 보여주며 그 장소가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서로 입을 맞추면서 시간을 보내는 영화의 세계’라 말합니다. 영화 작업은 스크린의 세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입니다. 종종 영화 감독들은 배의 선장이나 비행기의 조종사로 비유되곤 합니다. 그들이 어떤 항로로 진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러나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항해의 흥분과 기쁨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습니다. 트뤼포는 영화는 야간 열차처럼 그저 전진하는 것이며 영화 감독들은 결국 일 속에서, 영화라는 작업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운명이라 말합니다. 영화 감독의 삶은 그들의 영화보다 훨씬 가려져 있고, 그렇기에 두 시간 동안 보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반년, 혹은 수년의 시간을 어떻게 소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6월의 오픈토크는 스크린의 뒤에 숨겨진 영화 감독들의 삶의 내막을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입니다. 그 비밀스런 자리에 많은 분들을 초대합니다.

 

일시: 6월 24일(일) 14:00 <아메리카의 밤> 상영후

장소: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

진행: 변영주 감독(<화차>), 이해영 감독(<페스티벌>)

초대손님: 김종관 감독(<조금만 더 가까이>), 이혁상 감독(<종로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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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드는 것은 역마차 여행과 같다. 처음엔 유쾌한 여행을 기대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린다. … 촬영 시작 전엔 아름다운 영화를 찍고 싶지만, 문제가 생기면 야망은 수그러들고 그저 촬영을 끝낼 수 있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영화 속 영화, <파멜라를 소개합니다>의 감독 페랑(프랑수아 트뤼포)의 극중 내레이션이다. 페랑은 영화를 찍는 일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제작자는 영화 촬영이 빨리 끝나기를 재촉한다. 배우로 활약해야 할 고양이는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술에 취한 배우는 대사를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 영화 제작기간 동안 같은 호텔에 묵어야 하는 배우와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난잡한 스캔들이 일어난다.

 

 

페랑의 영화촬영기가 비록 험난할지라도, ‘영화에 대한 영화’인 <아메리카의 밤>이 트뤼포의 ‘영화찬가’임은 분명해 보인다. ‘릴리언 기쉬와 도로시 기쉬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자막으로 시작한 <아메리카의 밤>은 영화에 대한 사랑고백으로 넘쳐난다. 페랑이 밤마다 꾸는 꿈은 (아마도 그의 유년시절인 듯한) 꼬마가 영화관에 걸린 <시민 케인>의 스틸 사진을 훔치는 것이다. 영화 속에 부뉴엘, 드레이어, 루비치, 베리만 등의 감독들에 대한 책이 등장하는 것은 그들 영화에 대해 트뤼포가 바치는 존경의 표현이다.

 

 

한편으로 <아메리카의 밤>은 영화란 곧 관객들의 눈을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가령 촛불 속에 숨겨진 전구,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부분만 지어놓은 세트 등에서 관객들은 영화의 환영적인 속성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밤>은 스튜디오 시스템의 은폐된 영화 제작 과정을 폭로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구조적, 정치적 비판의 태도는 결여하고 있다. 즉 <파멜라를 소개합니다>의 촬영 현장은 자본과 예술이 충돌하는 장소가 아니라, 즐거운 유희가 벌어지는 놀이터에 가까운 것이다(로버트 스탬에 의하면, ‘한 말의 신비화를 위한 한 되의 탈신비화’). 결국 영화 촬영 도중 발생하는 애환은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비유와 함께 낭만적으로 해결된다. 실제로 트뤼포는 지방에서의 흥행이 저조하자 공동제작자에게 ‘영화 속 영화’라는 문구 보다는, ‘사랑과 모험에 관한 영화’라는 점을 강조하길 요구했다. 고다르가 <아메리카의 밤>을 보고 분개하며 트뤼포와 결별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밤>은 고다르뿐만 아니라 좌파 평론가들로부터도 ‘지나치게 타협적’이라는 가혹한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이에 대해 트뤼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든 나쁘든 나의 영화는 내가 만들기를 원했던 것일 뿐이며, 그 이외에 어떤 것도 아닙니다. 나는 이 영화들을,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내가 선정하고 사랑했던 배우들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즉 트뤼포에게 <아메리카의 밤>은 “체제 속에 투항해버린 것이 아니라, 체제 안에서 나의 방식대로 작업”했던 것이다.

 

 

트뤼포는 영화와 삶 중에서 영화를 택했다. 그에게 영화는 삶에 더해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삶 전체를 대신할 대체물이었다. 트뤼포는 영화가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았을 사람이다. 그를 마냥 낙천적인 시네필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알퐁소(장 피에르 레오)에게 “너나 나 같은 사람들은 영화를 찍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페랑은 체제 안에서 작업하며 자신의 존재성을 붙잡으려는 트뤼포의 현실 속 모습과 겹쳐 보인다. 이 장면은 영화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한 명랑한 분위기에 쓸쓸한 얼룩을 남겨놓는다.(송은경: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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