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예쁜 여자Une Belle Fille Comme Moi>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1972년 작품으로 헨리 파렐의 『나처럼 멋진 아이Such a Gorgeous Kid Like Me』를 원작으로 한다. 영화는 젊은 사회학자 스타니슬라스 프레빈이 여성 범죄자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카미유 블리스(베르나데트 라퐁)를 인터뷰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카미유 블리스는 한 남자를 살해한 혐의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프레빈은 그녀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를 녹음기에 담고 그녀의 행동을 사회학자로서 분석하려고 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녀가 지금까지 저질러 온 범죄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범죄는 어릴적 아버지를 죽게 만든 일이다. 그녀는 그 사건을 운명과의 내기로 설명한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간 틈을 타 그녀는 사다리를 치우고 아버지는 낙상으로 사망한다. 이 일에 대해 그녀는 만약 아버지가 사다리를 보았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능청스럽게 어린 시절의 사건을 말한다. 이 일로 그녀는 비행 청소년 센터에 수용되고 이후 그곳에서 도망친 뒤, 우연히 그 앞을 자동차로 지나가는 클로비스를 만나게 된다. 이후 등장하게 될 모든 사건들 역시 우연이라는 요소에 좌우된다. 클로비스와 결혼한 뒤 시어머니의 돈을 훔쳐 남편과 달아난 후에 일하게 되는 카바레 역시 우연히 자동차가 고장 났기 때문에 발견되었다. 그리고 쥐와 해충을 박멸하는 아르튀르를 만나게 된 계기 역시 단순히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처럼 카미유의 삶은 즉흥적이고 단순한 우연을 통해서 진행된다. 그녀가 하는 것은 단지 맞닥뜨린 우연에 대한 반응과 선택이며 범죄조차 본능적인 움직임처럼 보인다.

 

카미유는 그녀가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거리낌 없이 밝히지만 현재 그녀를 감옥에 있게 한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무죄를 주장한다. 사회학자 프레빈에게 카미유는 처음에는 논문을 쓰기 위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몇 차례에 걸친 인터뷰에서 카미유가 보여 준 천진함과 매력에 끌리면서 사회학자 프레빈은 그녀의 말을 믿고, 그녀의 무죄를 입증해 줄 증거를 찾아 다닌다. 감독인 트뤼포를 연상시키는, 영화에 미쳤다는 한 어린 소년이 찍은 영화 필름에 의해 결국 카미유는 석방 되고 유명한 가수가 된다. 하지만 그녀의 범죄 행각은 끝나지 않는다. 석방된 카미유는 프레빈을 집으로 불러 들이고 그들은 그녀의 남편 클로비스와 마주친다.

 

프레빈은 그녀에게 그녀의 남자들 중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을 던진다. 그녀는 태연하게 그들 모두를 사랑했노라고 대답한다. 마치 누구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듯이.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범죄와 사랑 모두에 적용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승패가 달린 운명과의 내기이며 우연히 찾아 오는 기회의 연장선이다. 프레빈은 그 기회들 중 하나다. 클로비스를 죽인 혐의로 감옥에 갇힌 프레빈은 그녀가 저지른 또 다른 범죄를 뒤늦게 깨닫는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 서점 직원이 사회학자 프레빈의 책을 찾는 여학생에게 그 책이 출간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때, 결말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우리가 지켜 볼 것은 그녀가 그를 계속 감옥에 있게 한 방법이며,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카미유 블리스라는 인물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손소담: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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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의 낭만적인 범죄물

 

평론가 시절부터 헐리우드 장르 영화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던 프랑수아 트뤼포는 감독으로 데뷔한 후에도 몇 편의 장르 영화, 정확하게는 범죄물을 만들었다. 고전기 헐리우드 필름누아르에 대한 재해석을 보인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나 트뤼포가 히치콕에게 받은 영향이 잘 드러난 <비련의 신부>(1968), 그의 마지막 영화인 <신나는 일요일>(1983) 등은 트뤼포가 범죄영화에 갖고 있는 관심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미시시피의 인어>(1969) 역시 범죄물의 필수요소를 고루 갖춘 트뤼포의 장르 영화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금발의 여인, 도망자를 쫓는 추적자, 비밀스러운 침입과 우발적인 살인,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어두운 과거. 여기에 <건 크레이지>(조셉 루이스, 1950)의 오마주 장면까지 나오니 이 정도면 이 영화를 범죄물로 분류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의외로 범죄물이라기보다는 두 연인의 치명적인 사랑이야기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장르적 요소들은 이야기의 기본 뼈대를 구성할 뿐 극의 분위기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대신 그 사이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의 갈등과 사랑이 극의 중심에 놓여있다. 만약 사전 정보 없이 <미시시피의 인어>를 본다면 얼마 동안은 이 영화를 단순한 연애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사건은 너무 늦게 일어나며, 남녀 주인공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

이런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 트뤼포의 개인적인 삶을 끌어들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다. 실제로 트뤼포는 과거 연인의 가슴 아픈 사연을 영화 속 마리온의 사연으로 가져다 쓰기도 했으며, 쫓기는 와중에도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며 <쟈니 기타>에 대한 비평적 견해를 주고받는 장면은 자연스럽게 트뤼포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영화를 찍기 전부터 까트린 드뇌브의 캐스팅을 주장했던(제작사는 브리짓 바르도를 캐스팅하려 했다고 한다) 트뤼포가 영화를 찍으며 그녀와 실제 연인으로 발전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트뤼포는 어쩌면 냉혹한 범죄물 보다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투영한 영화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무래도 영화의 전체적인 리듬이나 장르적 긴장감은 헐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점은 단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트뤼포의 특징을 선명하게 부각시켜준다. 트뤼포는 무슨 영화를 만들던 언제나 자신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으며, 심각한 범죄물에서조차 운명적인 사랑과 이로 인해 망가지는 남자 -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만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엔딩씬이 주는 무드는 각별하다. 해피엔딩도, 배드엔딩도 아닌 이 결말에는 단지 사랑에 대한 확신과 불안이 동시에 존재할 뿐이다. 지금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처한 위기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눈앞에 있는 상대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의 약간의 구멍들에도 불구하고 그 불완전함마저 낭만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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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가 만든 SF, 그리고 사회비판

 

 

<화씨 451>은 Sci-Fi 문학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했다. 제목이기도 한 '화씨 451'은 책이 불타는 온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크레딧은 여느 작품처럼 관객이 읽을 수 있도록 자막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소개된다. <화씨 451>은 사람들이 비판정신을 갖지 못하도록 책이 금지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몬태그(오스카 워너)는 사람들이 숨겨놓은 책을 찾아 태우는 방화수 fireman 다.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던 중 세상에 대한 온갖 호기심으로 가득한 이웃 여인 클라리세(줄리 크리스티)를 만나면서 꼭두각시 같은 삶에 의문을 갖게 된다. 자신의 삶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의 조언에 따라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 그때부터 몬태그의 생각과 행동은 극적인 변화를 맞지만 동료 방화수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트뤼포는 <화씨451>을 유니버설 제작으로 영국의 파인우드 스튜디오에서 만들었지만 이 영화는 스튜디오 시스템 전통 바깥에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크리스 마르케의 <방파제>(1961), 장 뤽 고다르의 <알파빌>(1965), 로제 바딤의 <바바렐라>(1967), 알랭 레네의 <사랑해, 사랑해>(1968)와 같은 Sci-Fi처럼 미래사회에 대한 현란한 볼거리의 설정은 최소화하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보다 부각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 때문에 원작자 브래드버리는 "썩 반갑지만은 않은 작품이었어요. 응당 따라야 할 원작의 줄거리도 지키지 않았죠. 몇몇 중요한 캐릭터는 완전히 사라졌어요. 하지만 엔딩은 정말 멋있었어요"라며 동명영화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전반적으로 <화씨 451>에 대해서 트뤼포의 걸작은 아닐지언정 가장 아름다운 엔딩을 가진 작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워 후세에 전달하는 일명 '북 피블'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비추는 영화의 결말은 원작이 품고 있는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화씨 451>은 비록 책이 금지된 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는 획일화된 사회 전체에 대한 비판에 더 가깝다(동성애의 억압을 암시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전까지 흑백 필름으로만 작업했던 트뤼포가 첫 번째 컬러영화로 <화씨 451>을 선택한 건 획일화를 반대하고 다양성의 가치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촬영은 <쳐다보지 마라>, <지구로 떨어진 사나이>를 연출한 니콜라스 뢰그가 맡았다). 하여 미장센은 물질과 자연의 철저한 대비 속에서 이뤄진다. 방화수의 유니폼, 비슷한 모양의 집 등과 같은 물질문명의 반대편에서 다양한 종류의 책으로 대표되는 정신문명의 회복을 역설하는 것이다.

가상현실이 실제현실을 압도하는 사회적 분위기, 즉각적인 반응에 익숙해진 세태 속에서 진지한 성찰이 사라진 시대, 그래서 책을 읽지 않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현실은 <화씨 451>이 묘사하는 사회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그 때문일까, 브래드버리의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화씨 451>은 프랭크 다라본트(<쇼생크 탈출>, <미스트>)에 의해 리메이크 추진 중에 있다(몬태그 역에는 톰 행크스가 물망에 올랐다). 그에 비해 트뤼포의 <화씨 451>은 오래된 과거의 작품이지만 다소 촌스럽게 보이는 화면과 달리 세월의 때를 타지 않는 메시지 덕분에 지금에도 충분히 볼만한 가치를 지닌다.

 

(허남웅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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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는 한 명의 영화작가가 얼마나 사랑을 가지고 그의 전 생애 동안 영화를 만들었는가를 보여준다. 사랑에 굶주린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했고, 영화로 만난 여배우들을 사랑했고, 사랑을 추구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400번의 구타>에서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앙투안 드와넬은 거리를 쏘다니다 몰래 우유를 훔쳐 마시는데, 벽에는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굶주림을 그린 위대한 희극왕에 대한 경배의 표현이다.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회에서 소외되어 불량소년으로 떠도는 인물의 삶이 채플린이 창조한 부랑자 찰리의 삶과 만나는 순간이다. 트뤼포는 이런 식으로 상실의 삶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기획으로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다.

 

트뤼포에게 영화는 수줍어하는 소년이 예쁜 소녀에게 고백하는 사랑의 감정 같은 것이다.그는 어린 시절 아벨 강스의 <잃어버린 천국>을 본 순간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전쟁 시기, 극장은 군인들로 들끓었다. 전선으로 떠나기 전 여자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온 군인들은 1차 대전의 비극을 그린 아벨 강스의 영화를 보며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그에게 어두운 극장은 감정의 제전이 벌어지는 장소이다. <앙투안과 콜레트>에서 앙투안은 극장과 유사한 음악 연주회장에서 건너편에 앉은 콜레트를 은밀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그녀에게 이끌린다. 관음증에 가까운 시선처럼 보이지만 요점은 극장의 어둠에 몸을 맡긴 수줍은 소년이 이러한 보기의 방식을 빌어 간신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트뤼포의 영화에서 우리는 영상을 점점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아이리스 기법처럼 감정의 표현이 다양한 영화적 기제들, 효과들, 장치들을 경유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 소심한 찰리의 감정은 건반과 현을 두드리는 해머의 무감한 메커니즘과 아이러니한 관계를 맺는다. 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살결, 자신의 삶을 부드럽게 터치하지 못한다. <앙투안과 콜레트>에서 앙투안은 음악회에서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음악과 소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은 그가 묵묵히 도자기처럼 레코드판을 굽는 긴 장면과 미묘한 관계를 맺는다. <도둑맞은 키스>에서 앙투안의 소심함과 주저, 수줍은 고백은 낭만적인 편지로 전달된다. 트뤼포는 지하 수도관처럼 보이는 긴 파이프를 따라 낭만적인 감정이 담긴 편지가 전달되는 과정을 길게 보여준다. 내밀한 감정을 표현의 기계적 메커니즘을 통해 전시하는 이러한 장면들은 트뤼포에게 영화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또 다른 강렬한 순간이 있다. <아메리카의 밤>에서 영화감독으로 분한 트뤼포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400번의 구타>의 레오를 떠올리게 하는 꿈속의 소년은 조셉 루이스의 <건 크레이지> 속 소년처럼 거리를 걸어 나와 영화관에 걸린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의 포스터와 사진들을 훔친다. <개구쟁이들>에서도 그렇지만 트뤼포는 이미지를 훔치는 소년에의 매혹을 여러 번 보여주었다. 거리의 소년은 그 자신의 순수한 이미지일 것이다. 소년이 훔치는 영화 포스터와 사진들은 그가 가져보지 못한 삶의 이미지들이다. 트뤼포는 삶에 관한 생각들 대부분을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얻었고, 영화의 역사, 과거와 현재를 시네마테크에서 배웠다고 고백한 감독이다. 영화는 그에게 삶보다 거대하고 매혹적인 것이었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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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사랑이야

 

* 프랑수아 트뤼포가 1971년에 남긴 앙투안 드와넬 연작에 관한 노트 <앙투안 드와넬은 누구인가?>를 바탕으로 쓴 글임을 밝힌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애초에 한 편으로 예정되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20년의 세월에 걸쳐 진행된 다섯 편의 영화 - <400번의 구타>, <앙투안과 콜레트>, <도둑맞은 키스>, <부부의 거처>, <사랑의 도피> - 를 말한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낭만적이면서 고전적인 남자의 이야기다(트뤼포는 앙투안이 19세기 식의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앙투안은 소년 시절에 이미 발자크를 비롯한 고전문학에 매혹되었고 삶의 매순간마다 일기와 편지를 쓴다. 그가 장차 쓰게 되는 소설은 일기와 편지의 확장에 다름 아니다. 인터넷과 핸드폰의 시대라면 앙투안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성장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앙투안은 어른과 사회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기에 계속 공간을 이동하고 직업을 바꿀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인간관계와 사랑에 있어 도무지 성장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그것은 프랑수아 트뤼포가 이 시리즈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앙투안은 천성적인 현실도피주의자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감독과 배우와 인물이 함께 엮어나간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다. 오디션에서 뽑힌 장 피에르 레오는 물론, 콜레트, 크리스틴, 사빈느 역할의 세 여배우 - 마리 프랑스 피지에, 클로드 자드, 도로시가 들락거리면서 다섯 편이자 결국에는 한 편인 영화를 완성했다. 배우들의 얼굴에는 세월의 자취가 남아 있으나, 그들은 배우가 아니라 실제로 그 인물인 양 자연스럽게 역할에 스며들었다.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1959)의 첫 촬영을 1958년 11월 10일에 시작했다. 그날 앙드레 바쟁이 40세로 생을 마감한다. 아버지로 여긴 바쟁의 죽음을 애도했던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를 그에게 바친다. <400번의 구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 앙투안은 슬프고 고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물에 변화를 가져온 건 장 피에르 레오라는 어린 배우였다. 오디션 당시 엄청난 열정으로 임해 트뤼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소년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트뤼포는 레오 덕에 각본보다 영화가 더 좋게 나왔다고 밝힌 바 있다. 트뤼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은, 레오가 첫 시사에서 보여준 반응에서 알 수 있다. 촬영 내내 밝은 모습으로 행동했던 레오는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속에 트뤼포의 어린 시절과 그의 현재가 함께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단편으로 기획됐던 영화가 장편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가 소년기의 아픈 경험들을 담기를 원했다. 십대에 이미 경찰서를 들락거린 트뤼포처럼, 13살 소년 앙투안은 가족과 학교가 공히 포기한 말썽꾸러기다. 거짓말과 가출과 도둑질로 인해 소년은 철창에 갇히고 감화원으로 보내진다. 앙투안은 말한다. “지겨워, 내 인생을 살고 싶어, 바다를 보고 싶어”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장면은 그 바람에 대한 대답이다. 해변으로 달려간 소년은 세상으로 향하는 모험의 문턱에 선다. 트뤼포는, 자신이 태어난 이듬해에 장 비고가 내놓은 <품행 제로>에 견줄 만한 작품을 만들었다.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의 속편에 대해 가끔 생각하면서도 속편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 두려워했다. 그의 두려움은 옴니버스 영화 <스무 살의 사랑> 중 프랑스 편을 의뢰받는 순간 사라진다. 그는 앙투안이란 인물을 다시 한 번 등장시키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자신의 과거를 살짝 변주하기로 한다. 영화에 미친 트뤼포는 음악에 빠진 앙투안으로 변했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릴리안 리트뱅을 만났던 기억을 음악회에서 앙투안과 콜레트가 눈길을 주고받는 것으로 바꾸었다. 17살 소년 앙투안은 레코드 회사에서 일하면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한다. 콜레트는 소년의 일상에 변화를 부른다. 소년은 소녀의 집 맞은편으로 숙소를 옮기고, 소녀의 가족과도 친해진다. 그러나 콜레트는 앙투안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그랬다. 아름다운 소녀 리트뱅을 놓고 경쟁했던 장 뤽 고다르와 트뤼포는 둘 다 쓴맛을 보고, 사랑의 실패는 자살 소동과 군 입대로 이어졌던 것이다(그러므로 다음 작품 <도둑맞은 키스>는 군인인 앙투안의 모습으로 발을 뗀다). 현실적인 소녀와 낭만적인 소년이 만났을 때 이미 예견된 첫사랑의 고통을 <앙투안과 콜레트>(1962)는 시리면서도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전한다.

 

연작의 세 번째 작품 <도둑맞은 키스>(1968)는 앙투안의 새로운 사랑이 그렇듯 덜컹거리는 작품이다. 촬영에 들어가고 며칠 뒤, 그 유명한 ‘앙리 랑글루아 사건’이 벌어진 탓이다. 당연히 랑글루아를 옹호했던 트뤼포는 일련의 사태들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인과 투사라는 두 가지 생활을 병행했던 트뤼포는 촬영장에 매번 늦게 도착했고 심지어 참석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각본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겪어야만 했으며, 배우들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대사를 만들어 내어 연기했다. 그런 까닭에 영화에 참여했던 스텝들은 <도둑맞은 키스>를 ‘작은 기적’이라 부른다. 연작 중 첫 컬러 영화인 <도둑맞은 키스>에서 앙투안은 여자 친구 크리스틴과 여신처럼 아름다운 부인 파비앙 사이에서 뒤뚱거린다. 그의 뒤뚱거림은 극중 그의 직업이 군인, 야간경비원, 사설탐정, 신발가게 점원, TV 수리공 등으로 바뀌는 것과 대응한다. 청년이 되어서도 앙투안은 모든 것에 서툴다. 그래서 그는 사랑스럽다.

 

<도둑맞은 키스>의 속편 격인 네 번째 작품 <부부의 거처>(1970)는 부부가 된 앙투안과 크리스틴의 이야기다(두 사람이 결혼한 걸 보고 싶다고 랑글루아가 트뤼포에게 말했다 한다). 도입부에 흘러나오는 현대음악의 불안한 향기는 부부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한다. 크리스틴은 집에서 음악 레슨을 하고, 꽃 가게에서 일하던 앙투안은 사무 착오로 미국계 회사에서 일할 기회를 잡는다. 드와넬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나는 한편, 앙투안이 회사에 손님으로 온 일본 여자와 외도를 하면서 부부생활은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트뤼포가 <부부의 거처>에서 원했던 것은, 레오 맥커리, 조지 큐커, 에른스트 루비치가 연출한 미국식 코미디의 분위기였다. 실제로 영화는 일상의 웃음으로 넘친다. 부부가 사는 아파트의 주변인물도 그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에필로그에서 재결합한 앙투안 부부는 사이가 나빠 보이는 이웃 부부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행동한다. 그때, 이웃 부인은 “두 사람은 이제 진짜로 사랑하게 됐어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부부의 거처>는 흐뭇한 미소로 마감된다.

 

 

연작이 이어지고 성공을 거두면서 드와넬이라는 인물과, 실재하는 두 사람 장 피에르 레오와 프랑수아 트뤼포 사이에서 웃기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트뤼포와 레오를 혼동한 카페 주인은 트뤼포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영화가 옛날에 만들어졌나 봐요. 그 때는 많이 젊어 보이더군요”라고 말했다. 신문 가판대의 남자는 먼저 왔다간 레오를 트뤼포의 아들로 착각하기도 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레오와 트뤼포가 앙투안이라는 가상의 인물로 융합되었음을 알려주는 예들이다. 트뤼포는 드와넬이 만화 캐릭터처럼 고정된 인물로 변하는 게 싫었던 것 같다. 게다가 <부부의 거처>를 마쳤을 무렵에 이미 트뤼포는, 레오라는 배우가 하나의 인물에 고착될까봐 걱정했다. 트뤼포는 <사랑의 도피> (1979)를 끝으로 앙투안이라는 캐릭터를 더 이상 영화에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사랑의 도피>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보다 이전 네 편 영화를 요약하고 총정리하는 쪽을 택했다. 전작에서 뽑아낸 장면(과 새로 찍은 몇 가지 장면)으로 플래시백을 완성하고, 등장했던 인물들의 관계를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그래서일까, 연작을 마무리한 뒤 트뤼포는 <사랑의 도피>가 진짜 영화처럼 보이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앙투안 드와넬 연작’이 어쩌면 실패한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앙투안 드와넬 연작’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영화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사랑의 도피>에서 앙투안은 편지를 쓰다 엄마가 가르쳐 준 단 한 가지 진실을 떠올린다. ‘중요한 건 사랑이다’ 앙투안이 그토록 현실 안팎을 서성인 것도 다 ‘사랑’ 때문일까. 그는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으나, 그 시간의 자리엔 사랑이 남았다. <사랑의 도피>는 레코드점에서 키스하는 두 커플과 어린 앙투안의 모습을 교차하며 끝난다. 놀이기구를 타다 어지러워하던 소년은 삶과 사랑을 경험하며 더욱 심한 어지러움을 겪는다. 그 어지러움 속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면 그건 사랑 덕분이다. 20년의 기록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다.

 

(이용철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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