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나부아의 유령>

 

지난 2월 26일, 서울아트시네마는 2주간 휴관에 들어갔다. 3일 전인 2월 23일, 정부가 코로나 19 바이러스 위기 경보를 ‘심각’ 단계로 격상하면서 감염병 확산 차단을 위해 다중 밀집 시설 이용 제한과 집단 행사 자제를 권고했기 때문이다. 극장 휴관이 의무 사항은 아니었다. 하지만, 1월 25일에 코로나 19 확진자가 방문한 멀티플렉스 극장이 임시 휴관에 들어가면서, 영화관은 사람들에게 위험한 장소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극장 관객수가 급감했다. 2월 한 달간 관객 수가 총 734만7028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7% 감소했다. 예술영화관 관객 수도 지난해 대비 60~80% 감소했는데, 확진자가 발생한 사례는 없다. 극장 휴관은 극장 스태프와 관객의 안전과 건강을 고려한 선택이다.

3월 초 개최 예정이던 ‘브루노 간즈 회고전Bruno Ganz Retrospective’은 일치감치 6월로 연기 됐는데, 조금 전 나는 이 기획전을 연말로 연기하자는 메일을 읽고 있었다. 최근 해외 관계자와 주고받는 메일 끄트머리에는 ‘Stay safe and healthy’라는 문구를 늘 적고 있다. 오늘의 상영작 대신 극장 입구 전광판에 ‘Stay Home Safe’ 라는 문구를 내걸고 문 닫은 해외 극장도 있다. 지난 세 달 동안 ‘극장에 영화 보러 오세요’라는 말은 금지어가 됐다. 아직 확실한 답변이 없지만, 기다리는 7월의 행사도 같은 이유로 취소되거나 연기될 것이다. 한국의 방역이 성공적이라 해도 팬데믹의 폭풍을 홀로 뚫고 나아갈 수는 없다.  

예정한 두 주의 휴관을 끝내고, 3월 중순에 동료들과 재개 여부를 논의했고, 극장 문을 다시 열었다. 당장은 코로나 19 감염확산으로 극장에서 상영 기회를 놓친 한국 영화와 수입 작품을 상영했다. 다행히, 4월 중순부터는 계획한 ‘존 카사베츠 & 셜리 클라크 회고전 John Cassavetes & Shirley Clarke Retrospective’을 예정대로 진행하고 있다. 셜리 클라크의 네 작품은 디지털 상영본을 모두 이메일로 전송받았다. 주기적인 방역, 입장시 발열 체크, 극장 안에서의 마스크 착용 권고, 좌석 간 거리 두기로 앞뒤 좌우 한 칸씩 자리를 비운 매표를 시행하고 있다. 2미터 거리 두기를 유지하기 위해 200석 극장에서 실제로는 70석 좌석만 판매한다. 반응은 제각각이다. 얼마 전, 존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의 여자こわれゆく女>(1974)를 보러온 커플은 서로 떨어져 앉아야 한다는 말에 난색을 보였다. 자주 오는 한 학생은 좌석 간 거리 두기로 전보다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 했다. 그런데 이렇게 빈좌석이 많아도 괜찮냐 말하고는, 내 안색을 살핀다. 사람이 적어서 나도 편하고 좋아, 라고 말했다. 

빈 말은 아니다. 나 또한 사람이 적은 큰 극장을 좋아 했다. 서울 근교의 허름한 극장에서 <동사서독楽園の瑕>(1994)을 서 너 명의 관객과 봤던 기억이 있다. 커튼이 올라가고 종을 울려서 영화 시작을 알렸던 500석이 넘던 지금은 사라진 극장이다. 두기봉ジョニー・トー의 <익사일エグザイル/絆>(2006)을 노부부와 이십 대 젊은 친구 한 명을 포함해 네 명이 봤던 날도 있다. 추운 겨울, 난방이 잘 안되는 450석의 극장에 열 명 남짓의 관객들이 거리를 두고 비스콘티ルキノ・ヴィスコンティ의 <백야白夜>(1957)를 보던 날의 차가운 기운이 아직도 피부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재작년 여름, 일주일 간의 프라하 여행길에서 들린 ‘키노 루체르나 Kino Lucerna’에서 나는 스무 명 정도의 관광객들과 <맘마미아 2>를 함께 봤다. 1907년에 개관한 이 아름다운 극장에서 당시 볼 수 있는 유일한 영화다. 앞 자리의 관광객 몇 명이 아바의 유명곡이 흘러 나올 때마다 객석에서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지켜 봐야 했는데, 꽤 유쾌한 기억으로 남았다. 

빈 자리가 많았던 극장의 기억은 이렇듯 내게 오래 남았다. 영화 체험이 꼭 그 자리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으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좋은 기억은 부재한 사람의 영혼까지 포함한다. 뒤셀도르프에서 보내온 후배의 풍경 사진 아래 ‘당신이 여기 없어서 너무 아쉬워’라는 문구처럼 말이다. 진정한 영화적 체험은 동반, 혹은 동반의 결여라는 사건이다. 빈 좌석, 결여의 관객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극장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극장의 빈자리는 정말 비워진 것이 아니라, 이미 떠난 사람들, 혹은 아직 거기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アピチャートポン・ウィーラセータクン의 ‘유령 관객'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날, 유랑극단의 영사 기사가 수수께끼 같은 남자에게 고용되어 외딴 암자에서 영화를 상영한다. 현지에 도착한 영사기사가 스크린을 설치했을 때,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조금씩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상영 내내 그들은 나란히 가만히 앉아 있고,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영화가 끝나자 일어서 훌쩍 떠나버린다. 다음 날, 영사기사는 자신이 묘지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가 고용된 것은 영혼들에게 영화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빈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유령들로 가득하다. 아니, 유령들도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요즘의 빈자리를 보고 있으면 그런 유령 관객들이 생각난다. 

코로나 19 감염확산으로 극장들이 휴관하면서 위기에 처한 극장을 후원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극장이 휴관중이라도 미리 표를 구매하기도 한다. 영화가 보고 싶지만 불안한 마음에 극장에는 가지 못하고, 대신 후원하는 마음으로 표를 예매하는 이들도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시작한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o 라는 커피 기부행위가 생각난다. 이는 주문해 놓고 마시지 않는 커피, 혹은 맡겨 둔 커피를 말한다. 이런 기부의 저변에는 커피를 마시는 일이 인류애, 우정 등과 같은 사람 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인식이 있다. 친구와,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연대가 없다면 커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 또한 그와 마찬가지다. 지금 극장에 관객이 오지 않아도, 옆 자리에 지금 사람이 없어도, 빈 자리를 생각하며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 시네마 소스페소 cinema sospeso가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영화표를 구매했지만, 정작 극장을 찾지 않는 행위를 ‘영혼 보내기’라고 부른다.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한 독립 영화의 흥행을 위해, 여성 영화의 선전을 기대하며 관객들이 이런 응원을 하는 경우가 있다. 말 그대로 좌석은 비어 있는데,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영혼이 영화를 보는 셈이다. 이를 새로운 관객 운동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고, 진정한 의미의 관람이 아닌 소비자 운동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휴관한 극장을 후원하기 위해, 빈 좌석을 채우기 위해 표를 구매하는 행위가 일종의 ‘영혼 보내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관의 빈자리는 그래서 곤경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 대면의 타인을 넘어서 그 자리에 있지 않은 미지의 타인과 교류하기 위해 빈자리를 생각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빈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를 영혼으로 채워야 한다. 좋은 영화관은 빈자리의 영혼의 무게로 살아남는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

* 이 글은 일본의 Web Magazine「Filmground」 5,6월호 '영화관'에 관한 특집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s://www.filmground.net/posts/2020/5/6/cinema-sospeso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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