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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극장 직원의 극장 일기- QR 코드

극장 직원의 극장 일기

QR 코드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극장 직원들이 해야할 일도 늘어나고 있다. 요즘 우리들은 ‘QR코드 체크인’을 실시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개인 정보가 포함된 QR코드를 생성한 다음 극장에 들어가기 전 내가 이곳에 왔다고 ‘신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확진자가 극장에 왔을 경우 다른 시민들에게 빨리 연락을 취해 전염병 전파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관객으로서는 믿을 만한 안전 장치가 하나 더 생긴 셈이며, 직원 입장에서도 이름과 연락처, 주소를 일일이 종이에 쓰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다. 처음에는 어려워하는 관객이 많았지만 이제는 다들 알아서 척척 등록하고 들어가신다. 하지만 극장문 앞에 앉아 관객을 안내하다가 QR코드 등록이 극장을 찾는 행위의 성격을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그렇듯 나도 익명의 상태로 도시를 돌아다닌다. 어쩌다 아는 사람과 우연히 만나더라도 그건 정말 예외적인 경우다. 혼자 있는 나는 ‘아무도 아닌 사람’이고, 이 익명이란 조건은 적지 않은 편안함을 준다. 내가 극장 주변의 종로3가에 있을 때보다 홍대나 강남 같은 다른 낯선 동네를 돌아다닐 때 더 느슨해지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누구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조건.

극장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아닌)극장에 혼자 가서 표를 끊고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불이 꺼지길 기다렸다가 영화를 보고, 영화가 끝나면 다시 극장문을 나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아는 사람을 누구도 만나지 않고 ‘nobody’로 남아 있는 건 꽤 기분 좋은 경험이다. 심지어 남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영화를 봤다는 즐거운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물론 내가 어디서 뭘 했는지는 교통카드 정보와 카드 결제 내역에 고스란히 남아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극장은 익명의 즐거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간 중 하나다.

그런데 이제 한동안은 그런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내 이름과 생년월일, 거주지, 연락처, 이동 동선 등이 포함된 QR코드를 등록하고 영화를 보러 들어간다. 물론 극장 직원과 다른 관객들은 여전히 나의 존재에 무심하겠지만, QR코드를 스캐너에 찍는 순간 내 안에서 은밀하게 시작되던 극장 방문의 즐거움은 이미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특정한 시간에 이 장소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겨야 하며, 언젠가 누가 그 흔적을 좇아 나를 찾아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혼자 얌전히 극장을 찾아도 나는 더이상 익명의 관객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어쩌면 곧, 여기에도 익숙해질 것이다. 오히려 아무 정보도 남기지 않고 극장에 들어가는 걸 불안하고 낯설게 느끼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다만 여전히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 가운데 그 변화의 과정을 직접 겪고 있는 극장 직원으로서 이런 기록 하나는 짧게 남겨둬야 할 것 같았다. 

김보년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