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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에세이] 극장에서 로메르 영화를 본다는 것





문화적 취향으로 사람을 가늠하는 건 오만하고 어리석은 시도지만 어떤 영화들은 분명 그의 성격을 짐작할만한 특성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테면 저는 일전에 좋아하는 감독으로 웨스 앤더슨과 알렉산더 페인을 꼽았다가 웃음기 어린 걱정과 우려의 질문을 받았었거든요. “아니, 남자친구도 희원씨가 그런 거 좋아하는 거 알아요?” 과연.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 같아도 그런 여자랑 연애는 하기 싫겠다. 왠지 영 서투를 것 같잖아요.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이 이런 특징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영화를 보고나면 "넌 델핀이 맘에 들어?"(녹색광선)라던가, "레네트랑 미라벨 중에 누가 마음에 들어요?"(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같은 단순한 질문을 심리테스트 하듯 가벼이 건네게 되거든요. 만약 상대가 이 질문에 델핀을 상냥히 연민하고, 레네트의 완고함을 귀엽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저로써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고 한결 솔직해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녹색광선>을 마침내 극장에서 보고나서는 예기치 못하게 부끄러움에 빠져들었습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저는 들떴었어요. 로메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순수하고 다부지고, 예민하면서도 건강한 폴린느 소녀(해변의 폴린느)이지만, 가장 애틋하고 아끼는 인물은 아무래도 <녹색광선>의 델핀이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보면 어깨로 걸어 다니는듯한 마르고 창백한 파리지엔느. 그녀가 예민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사람들 사이에 있거나, 반쪽짜리 미소를 띤 채 어정어정 바닷물에 몸을 적시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 또한 입은 웃고 눈썹은 우는 이상한 표정으로 ‘델핀, 난 네 맘 다 알 것 같아!’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리거든요. 그런 그녀가 마침내 행복을 엿보는 순간을 극장에서 둥글게 웅크리고 보려니 기뻤습니다.

헌데 기쁨 대신 부끄러움이 찾아 온 까닭은, 관객들이 너무 웃었기 때문이었어요. 물론 누가 뭐래도 영화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방구석에서 혼자 모니터를 통해 델핀을 볼 때와는 달랐어요. 울먹이는 델핀의 모습 뒤에 웃음이 터져 나올 때 저는 정체불명의 당혹감을 느끼며 따라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왠지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어요. 그녀를 보며 마음 놓고 웃을 수 없다는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돌아오는 길에 그 까닭을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제가 들통나버렸다고 느꼈던 것이었어요. 당연히 전 델핀이 아니지만, 그 웃음들이 어쩐지 제 은밀한 눈물들을 겨냥한 것처럼 느껴졌던 거예요. ‘혼자 보러 가길 잘했어.’ 극장에서 사람들과 로메르 영화를 보는 일에는 마음의 음지를 들킬 위험성이 있단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재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스펙터클도 못 건드리는 마음의 가장 구석진 곳을 찌르는 로메르 할아버지의 네모반듯한 스크린이 주는 스릴! 그래서 말인데, 친구들 영화제의 마지막 날에 가장 만만찮은 아가씨가 아직 한 명 남아있거든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결혼>의 고집불통 사빈느. 이 아가씨가 부리는 억지를 보면서 각자 자기 도량의 깊이를 재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담하건데 착각하는 그녀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민망함에 두 눈 질끈 감는 관객도 분명 있을 거예요. 괜찮아요.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앞 줄 모퉁이에서 입술을 깨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관객도 분명 있을테니까요. 저 말입니다. 쯧쯧. 상냥한 관객 여러분은 못 본 척 해주시리라 믿으며 이 글을 마칩니다. (백희원 서울 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