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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특별전

[Feature] 크리스 마르케 메모

 

 

0. 크리스 마르케의 작품 세계를 정연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글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음. 그와 같은 이해를 위해서는 다른 좋은 평자의 글이나 강연을 추천함. 지금 이 자리는 오히려, 수많은 단상과 푸티지들의 결합을 통해 이르게 되는 환각의 분위기 또는 픽션의 상태, 어쩌면 그것이 크리스 마르케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그와 유사하게 그의 영화를 잠시 느껴보려는 시도로 마련되었음. 따라서 “이미지는 자발적으로 온다” 는 앙드레 브르통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부디 이 자리를 피하시기를 권함. 의도적으로 넘치게 배치된 인용문과 지극히 사적이고 불완전한 메모가 뒤섞인 이 몽타주로서의 글쓰기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주술 걸기. 그러므로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해도 단 하나의 진실에 대한 믿음이 여기 있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기억을 불러 오는 과자 마들렌느에 관해서라면, 그 생김새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 향을 맡는 것이 중요하다는 바로 그 진실에 대한 믿음.

 

1. 프랑스의 영화 전문지 <포지티프>의 전후시기를 이끌었던 뛰어난 평론가 로제 따이외르는 크리스 마르케에 관한 장문의 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간단하다: 크리스 마르케는 작가/이미지-사냥꾼이고 명상에 잠긴 여행자이고 프랑스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세계 시민이며 혁명적 예언가이고 꿈꾸는 몽상가-시인이며 진지한 유머주의자이고 세계 동물 보호 협회의 휴머니스트 멤버이며 음악적인 다큐멘터리 작가이고 변증법적 이상주의자다” 이게 간단한가. 로제 따이외르가 길게 나열하여 적어 놓고 실은 간단하다고 우기며 강조하고자 한 크리스 마르케의 간단함 아니 그에 관한 명료함이란 무엇인가. 그가 그 어느 누구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이며 활동가였고 창작자였다는 바로 그것이다.

 

1-1. 정작 간단하게 소개한 건 크리스 마르케 본인이다. “나는 에세이스트다” 라고 그는 말했다. 뒤이어 “영화란 장 뤽 고다르가 소설가가 될 수 있게 해주고 아르망 가티를 극작가로 만들어주고 내게 에세이를 쓰도록 허락해주는 시스템이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두 번째 문장이 멋지게 들리지만 그건 첫 번째 문장에 대한 수식이니 첫 번째 문장이 더 중요하다. 가령 존 포드가 자신에 관하여 “나는 서부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라고 할 때에 그 간단한 소개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영화사의 거대하고 깊은 비밀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크리스 마르케의 이 자기 소개도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2. 지독한 여행자가 자기의 고향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일 때 그건 어떤 마음일까. 크리스 마르케가 파리를 걷는 것은 아녜스 바르다가 파리를 걷는 것과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건 그냥 대책 없는 느낌인데, 크리스 마르케가 파리를 온전히 사랑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에게는 어딘지 동시대 파리에 대한 불안 또는 불만이 종종 엿보인다. <아름다운 오월>은 1962년, 8년간의 알제리 전쟁이 종식되었을 그 때 크리스 마르케가 문득 5월의 파리 거리로 나아가 수많은 시민들을 만나 인터뷰하며 그들의 표정과 말 속에서 당대의 환경과 문화와 정치적 문제들을 짚어낸 작업이다. 그 때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태도는 어딘가 반신반의이거나 전략적 객관성이다. 그래서인지 크리스 마르케의 가장 투철한 정치 영화는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나 <붉은 대기>이겠지만 그의 가장 평평한 정치영화는 <아름다운 오월>일지도 모른다. 크리스 마르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영화를 촬영한 55시간은 하나의 횡단면이다. 나는 이 횡단면으로부터 어떤 총체성이 솟아나는 그런 방식을 취하려고 노력했다.” 이때 횡단면과 총체성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주목하게 된다.

 

2-1. “횡단면(cross section)”. 크리스 마르케가 평생 좋아하여 수십 번을 보고 또 보았다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에서 ‘횡단면’이라는 낱말이 불쑥 등장하는 순간을 나는 운 좋게도 지금 막 기억해 냈다. 당신은 어떤 장면에서였다고 기억하는가. 우린 결국 이 장면을 다시 말하게 될 것이다.

 

2-1-1. “총체성”. <아름다운 오월>을 만든 지 수십 년이 흐르고. <레벨 5>를 만들었을 즈음 당시 <르 몽드> 지의 기자 장 미쉘 프로동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별안간 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한 번도 ‘만약에, 왜, 어떻게’ 등에 대해 궁금해 해본 적이 없다”면서 “영화란 총체성이다”라고 선언하듯 또 말해 버린다. 그에게는 ‘저절로’ 오는 것에 대한 어떤 믿음이 있다.

 

2-2. <아름다운 오월>에 비해 1년 앞서 만들어진 장 루슈의 <어느 여름의 연대기>. 사람들은 크리스 마르케가 <아름다운 오월>을 만들 당시 이 영화를 염두에 두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오랜 만에 <아름다운 오월>을 보는 나에게는 난데없이 다른 영화가 자꾸 끼어든다. 에릭 로메르의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물론 엉뚱하고 쓸모없는 연상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연상을 함부로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크리스 마르케는 소비에트의 작가들에게서 배웠고, 그런 방식의 연상들이 크리스 마르케의 숏들에 생명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3. 크리스 마르케가 일본에 관하여 만든 영화 중 대표작 또는 그의 영화 전체 필모그래피에서도 늘 첫 번째로 손꼽히는 작품 <태양 없이>는 롤랑 바르트가 일본에 대해 쓴 <기호의 제국>과 비교될 만 하다. 적어도 크리스 마르케가 기호들의 세계로 일본이라는 사회를 느낀 건 확실한 것 같다. 한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크리스 마르케는 평생 일본을 사랑했다기보다 평생 일본을 궁금해 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의 인류애의 기본은 애정보다는 호기심일지도 모른다.

 

3-1. 크리스 마르케가 도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그가 도쿄에 오면 꼭 들른다는 신주쿠 골든 가의 술집 ‘라제 떼’(크리스 마르케의 단편 영화 제목)를 나보다 한참 나이 많은 남자와 나와 동갑인 여자와 셋이 찾았다가 가게가 휴업이라는 걸 확인하고 쓸쓸히 뒤돌아섰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고 전철이 끊긴 뒤였다. 그날 밤새 시끄러운 그저 그런 술집에서 서로 심심하게 보낸 다음 첫 전철을 타기 위해 신주쿠 역으로 향했을 때 우린 그만 거기에서 우리처럼 첫 차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는 인산인해의 젊은이들 사이에 묻혀 버렸다. 새벽인데 출근길의 인파였다. 그때 나는 크리스 마르케가 궁금해 하는 일본이란 이런 것인가, 그가 여기 있었다면 분명 이 장관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했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천정부지로 높은 택시비라는 현실 조건이 만들어낸 S.F적인 도시의 미장센은 주말 밤마다 내가 없는 날에도 계속 되었을 것이고 계속 될 것이다. 내게는 2003년 12월 도쿄, 어느 추운 밤의 일이었다.

 

3-2. 그런데 위 단락을 쓰고 나니 <태양 없이>에 등장하는 유명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나는 도쿄의 1월을 기억하기보다 도쿄의 1월을 촬영한 이미지들을 기억한다. 그것들이 나의 기억으로 치환되었고 그것들이 나의 기억이다” 그러니 나는 신주쿠의 그날의 새벽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유사하게 크리스 마르케 영화에 담겨 있는 신주쿠의 이미지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 날의 새벽이 특히 인상 깊었고 그 때문에 온전히 나의 기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3-3. <태양 없이>에서는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한 여인이 어느 남자에게서 온 편지를 간접화법으로 혹은 직접 화법으로 옮겨 우리에게 읽어준다(엔딩 크레딧에 이르러 이 남자의 이름을 알 수 있지만 몰라도 무방하다). 일단은 편지의 낭독이므로 우리가 보는 영상과 말은 그녀가 우리에게 전하는 그 남자의 것이겠지만 거기에는 편지에 대한 저 여인의 반응과 기억이 괄호 안에 전제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이 그 남자가 온전히 원한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저 여인의 반응과 기억이 개입한 이후에 달라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중요한 건 누군가에게서 온 편지를 낭독한다는 이 단순해 보이는 우회적 절차 혹은 영화 형식이 이 영화의 텔레파시를 훨씬 더 강력한 주파수로 증폭시킨다는 그 사실일 것이다. 말하자면 근래에 동세대 작가들 몇몇이 서로 나눴던 영상 편지 시리즈를 보고 있자면, 이렇게 둘이 맞대고 해야만 겨우 가능한 그 일을 크리스 마르케는 이미 혼자서 <태양 없이>에서 다 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은 언젠가 쓰기도 했던 것 같다.

 

3-4. 아마 내가 생전의 크리스 마르케를 만나 <태양 없이>에 관해 질문할 기회를 갖게 되었더라면 나는 이 영화에 내내 울리는 그 괴상한 테크노 음향의 정체에 대해서 물었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그 음향들로만 놓고 본다면, <태양 없이>에서의 일본은 거대한 빠칭코 기계이거나 아무도 없는 터널이거나 환각 상태에 빠진 마약장이거나 고장 난 컴퓨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다른 식의 음향은 일본이라는 미스터리를 해친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일까.

 

3-5. 그리고 사소하기 짝이 없지만 인상 깊은 장면 하나. 크리스 마르케의 부고 원고를 청탁하고 그의 사진을 찾던 중 무척 애를 먹었는데, 이유는 그가 평생 동안 미디어에 나서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태양 없이>에는 그 시절 그의 모습이 잠깐, 아주 잠깐 등장한다. 아니 등장한다기보다 반짝했다고 해야 맞겠다. 영화가 시작한 지 53분경, 1초도 안되는 시간 동안 길거리의 어떤 모니터인지 신호등인지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크리스 마르케의 얼굴이 찰나에 반사되어 스친다. 나는 종종 이렇게 눈을 찌르고 들어오는 사소함을 목격할 때 짜릿하다. 그가 그 시간 그 장소에 진짜 있었으므로, 바르트라면 이런 걸 두고 푼크툼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4. 12년 전인 2000년 어느 날 서울에서 열린 한 영화제에서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들 몇 편을 난생 처음 보았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때 가장 난감했던 영화는 <레벨 5>였다. <레벨 5>가 만들어진 건 당시로부터 3년 전인 1997년이었고 인터넷은 초창기 시절이었고 아직 우리는 컴퓨터에 플로피 디스크를 꼽아 쓰고 있었고 나는 그것조차 어색해 하던 사람이었다. 그때 찾아온 이 영화의 최첨단 이미지들은 현란했고 낯설었고 미래적이었다. 그 즈음 프랑스의 저명한 평론가 레이몽 벨루어는 이 영화를 두고 “문화적 기억과 컴퓨터의 이미지-사운드의 생산물, 그 사이의 연결을 조사한 새로운 종류의 영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에 이르러 <레벨 5>를 다시 보니 난감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과욕의 작품처럼 보인다.

 

5. 앙드레 바쟁이 왕성한 활동을 펼칠 때 그의 토론회를 열심히 따라 다닌 경력이 있는 크리스 마르케는 그러니까 처음부터 시네필이었다. 이 시네필은 영화에 관한 논평의 영화들을 만드는 데에 크나큰 재능을 발휘했다. 다음 세 작품은 크리스 마르케가 그려낸 ‘영화감독의 초상’이라 할 만한데 이 영화들에 담긴 개별 작가에 관한 애정과 통찰과 감식안은 뛰어나다. <A.K:구로사와의 초상>, <마지막 볼셰비키>, <안드레이 아르세네비치의 어떤 하루>, 이 세 편의 영화를 통해 나는 구로자와 아키라가 촬영 현장에서 세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상승과 하강의 운동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알렉산드르 메드베드킨이라는 숨겨진 소비에트 감독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게 되었다. 고백컨대, 이 작품들을 본 이후로는 그 어느 영화감독의 초상을 담아낸 모종의 작품을 접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기준은 언제나 이 작품들이 되곤 했다.

 

5-1. 알렉산더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어떤 하루>에서 제목을 빌려온 <안드레이 아르세네비치의 어떤 하루>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첫째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논평하는 크리스 마르케의 해박한 감식안이고, 둘째 죽음을 앞에 두고도 마지막 작품의 후반작업에 매진하는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가적 당당함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장면을 말하려고 한다. 파리에 망명중이며 더군다나 죽음을 앞에 놓고 투병중인 타르코프스키에게 마침내 젊은 아들이 찾아와 둘이 뜨거운 해후를 하는 초반부 장면이 있다. 그 때 타르코프스키는 이 장면을 촬영중인 크리스 마르케를 향하여 “크리스! 다 담은거지?” 라고 돌연 묻는다. 이 장면은 뭉클하다.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날 거라는 걸 직감하고 있는 자가 지금 이 생의 기쁜 순간이 기록되었는지 되묻는 장면이라 그렇다. 그러니 여기에 크리스 마르케식의 몽타주를 감행하는 것이 나로서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태양 없이>의 첫 장면을 여는 T.S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의 시구를 그래서 여기 붙인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시구를 알기에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5-1-1. “시간은 늘 시간이고//자리는 늘 자리일 뿐//있는 것은 오직 한 순간//한 자리에만 있다는 걸 알게 되리니”

 

 

6. 크리스 마르케가 애묘가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 이 애묘가에게 파리 시내 곳곳에 웃는 고양이 그림이 등장하고 그 그림이 당시의 반정부 시위대 속에서 재발견될 때 그건 크리스 마르케에게 탐구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영화 <웃는 고양이>는 그렇게 시작한다. 크리스 마르케는 이 영화에서 표식을 따라 세상의 비밀을 알아내는 탐정을 자처한다. 거리 미술가 토마 뷔유가 창작하고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된, 그래서 파리라는 도시의 그 어느 벽과 길바닥과 피켓 등에 무수하게 새겨진 웃는 고양이를 계기로 그는 고양이의 계보학도 형이상학도 그려보며 프랑스 사회를 논평한다. 그것이 이 영화의 공공연한 가치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 이미지의 표식을 좇아가며 한 편으로는 영화 자체의 리듬을 웅크리고 도약하고 할퀴는 고양이의 동작에 가깝도록 탄력 있게 만들어가며 사회를 논평하는 그 기술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사소한 두 번째 가치가 있다. 그래, 크리스 마르케가 21세기에도 나와 함께 살고 있었구나, 이 영화를 보면 결국 그 생각이 든다.

 

6-1. 비교컨대 사람으로서 장 뤽 고다르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는데 크리스 마르케라는 사람은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쯤 만나보고 싶었다. 어차피 만날 기회는 없었겠지만 지금은 아예 그럴 수도 없게 됐다. 왜냐하면…

 

7. 2012년 7월 29일 크리스 마르케가 세상을 떠났다, 고 그 며칠 뒤에 들었다.

 

7-1. 알랭 레네는 오래 전에 그의 친구 크리스 마르케에 관하여 썼다. “크리스 마르케는 19세기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모든 욕구와 의무,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또 다른 나머지 것들을 위해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종합을 이룩해냈다”라고. 이때 중요해 보이는 말이 종합이다. 로제 따이외르가 간단하다고 말한 그것 혹은 크리스 마르케 자신이 총체성이라고 말한 그것을 우린 이 순간 기억해 내야 한다. 20세기를 살았으나 19세기적 인간으로 평가 받았고 늘 저 먼 미래에서 온 것은 아닌지 여겨졌던 이 위대한 창작자의 죽음 앞에서 모든 추모가 그렇듯이 과장된 그리움이나 유대감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그의 죽음을 말한다 해도 우리는 분명 크나큰 상실을 입은 게 분명하다.

 

7-2. 이렇게 말하는 게 옳겠다. 시인이자 화가인 앙리 미쇼는 언젠가 크리스 마르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프랑스의 대학교) 소르본느를 부수고 그 자리에 대신 크리스 마르케를 세울 것!” 우리는 2012년에 한 인간을 잃었고 비상한 창작자를 잃었을 뿐 아니라 예술로서의 영화가 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것을 이미 이룩해낸 어떤 거대한 지성 즉 크리스 마르케라는 위대한 학문을 잃은 것이다.

 

8. 하지만 결국 이 글은 2-1에서 했던 질문의 답으로 마쳐야 한다. <현기증>의 주인공 스코티가 한 여인과 함께 수목원을 찾아 거기 서 있는 거대한 수목의 잘려진 ‘횡단면’을 보고 있을 때 미국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시간의 나이테가 그들 앞에 있다. 크리스 마르케의 <라제떼>를 극영화로 옮긴 테리 길리엄의 <트웰브 몽키즈>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극장에서 보는 장면도 바로 이 장면이다. 여인은 그 때 나무의 나이테와 나이테 사이를 짚으며,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너비를 짚으며, 나는 여기서 여기까지 이렇게 조금 살다 가는 것이니 내가 죽더라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말한다. 넓디넓은 나무의 단면이 보여주는 역사 속에서 그녀가 짚어낸 자신의 생의 길이는 실로 작다. 하지만 여인의 말은 틀렸다. 그 여인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고 이 장면을 볼 때마다 함께 떠오를 크리스 마르케도 아마 그럴 것이다.

 

8-1. 나무에 새겨진 시간의 나이테 안쪽이 과거이고 바깥쪽이 미래라고 할 때 크리스 마르케는 안쪽으로 갔을까 바깥쪽으로 갔을까. 우린 알 수 없다. 다만 기억을 부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과자도 <현기증>의 그녀의 이름도 둘 다 마들렌느였다는 사실과 프루스트와 히치콕의 두 마들렌느를 크리스 마르케가 평생 몹시 좋아했다는 사실과 실은 크리스 마르케 그 자신이 세상을 기억하게 하는 과자 마들렌느이면서 세상의 기억에 홀린 여인 마들렌느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글 / 정한석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