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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100편의 시네마오디세이2-친밀한 삶

[Cinetalk] 자크 리베트의 '미치광이 같은 사랑' 시네토크

자크 리베트 <미치광이 같은 사랑> 상영 후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시네토크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에 ‘친밀한 삶’이라는 제목의 특별전을 하면서 소개하는 몇 편의 영화들이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 보신 리베트의 영화는 몬테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이나 필립 가렐의 영화, 찰스 버넷의 영화와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모두 삶의 내밀함을 영화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라신의 연극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들을 제외하면, 사실 관객에게 명료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자크 리베트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주일 후에나 열흘 후에 혹은 몇 주, 몇 년 후에 현실적인 삶과 연결되었을 때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말했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지금 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감상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야기하려 한다. 

 <미치광이 같은 사랑>은 68년 가을에 제작을 시작해서 69년에 소개된 된 작품이다. 68년은 리베트를 비롯한 많은 감독들은 랑글루아 사태 때문에 뛰어다니던 시기이자 칸 영화제에서 저지 투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이 영화는 사십대 누벨바그라고 부를 법한 영화다. 1928년생인 리베트가 마흔을 넘기고 만든 영화로, 가렐의 <더 이상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그런 사십대를 넘긴 남자의 사랑이야기였다. ‘누벨바그’라고 했을 때 젊은이들의 패기 넘치는 사랑이야기나 끓어오름의 느낌들이 있을 텐데, 이 영화들은 그런 것보다는 숙성된 사랑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숙성되다 못해 파산에 이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치광이 같은 사랑>에는 세바스티앙이 연출하는 연극이 진행되는 것과 동시에 세바스티앙과 클레르라는 남녀의 현실에서의 삶의 문제가 동시에 진행되는데, 이 둘의 관계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연결되는 지점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완성된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출발점과 끝 지점을 장식하는 것은 라신의 연극인데 마찬가지로 우리는 라신의 연극이 완성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백색의 공간만을 볼 수 있다. 이 백색공간은 사각의 링 같기도 하고 흰 도화지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것을 영화라고 생각했을 때는 백색 스크린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백색 스크린의 평면 안에 무언가를 넣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목적만으로 보자면 흰 스크린에 무엇인가를 넣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고, 최종적인 결과물은 결국 보여주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작품이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영화에서의 결과를 중요하게 본다. 한 부류는 제작자나 투자자이고 마찬가지로 관객으로서 우리도 영화의 결과를 보는 사람들이다. 관객은 결과로서의 영화를 보는 것이지 개인적인 친분이 있지 않는 이상, 과정으로서의 영화를 보러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과정의 시간과 리듬을 담아냈다는 점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완성에 대한 강박이 없는 영화로 보인다. 이것은 몬테 헬만이나 필립 가렐, 찰스 버넷의 <양 도살자>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몬테 헬만은 자크 리베트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 한 바 있고 <자유의 이차선>을 만들 때에는 리베트처럼 영화를 구성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화들은 모두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면서 실패를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영화를 만드는 행위로 인해서 몬테 헬만은 스튜디오에서 추방당했지만, 리베트는 반대로 자신의 영화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의 리베트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제대로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트뤼포의 전기를 보면 당대의 최고 시네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뤼포나 고다르 같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알려지는 것에 비하자면 리베트는 자신을 알리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크 리베트가 <미치광이 같은 사랑> 같은 영화에 도달해가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1965년 무렵에 리베트는 ‘우리시대의 영화감독’이라는 TV다큐멘터리로 장 르누아르에 관한 다큐를 찍게 된다. 그 과정에서의 르누아르와 나눈 영화작업과 이야기들이 리베트의 영화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리베트는 배우와의 관계나 집단적으로 작업하는 과정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됐고, 감화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가장 르누아르적인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만든 게 이 영화다. 


다른 한 가지는 리베트가 <수녀들>이라는 영화작업을 하면서 연출방식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수녀들>은 처음에는 연극으로 공연된 뒤에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작업에서 그는 굉장한 지루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출방식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연출방식을 바꾸겠다는 것은 감독이 무언인가를 컨트롤하거나 크게 디렉션하지 않고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하는 것이다. 


<미치광이 같은 사랑>을 보면 세바스티앙이 연극을 연출할 때 그런 방식으로 한다. 책 자체를 통독하면서 배우들이 직접 연극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을 취하는데, 리베트가 이 영화를 찍을 때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공동적인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라신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리허설 과정을 찍는 것과, 클레르가 연기를 중단하고 크리스티앙과의 관계가 파국적으로 끝나가는 기본적인 구성만을 해놓고, 영화의 매 순간마다 쪽대본을 만들어 즉흥적으로 구성했다. 시대적으로 1968년경에는 프랑스 영화에서 누벨바그 작가들이 개인성을 내세우는 것에서 후퇴하는 시대적 흐름이 있었다.  고다르는 작가의 개인성을  내세우는 것이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보고,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지가 베르토프 집단이라는 공동작업 형태로 전환시했다. 리베트의 새로운 연출방식은 시대적으로도 조응하는 것이었다. 작가의 개인성의 후퇴라는 것을 통해서 영화에 들어갈 때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배우’의 존재성이다. 이 영화가 4시간 가량을 지속하면서 보여주는 것은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두 명의 배우들이 보이는 특별한 퍼포먼스들이다. 특히 뷜 오지에라는 여배우가 보여주는 히스테릭하거나 다변적인 심리적 상태를 보여주는 연기는 정말 놀랍다.  

 

이 영화에는 두 층위의 연기가 있다. 하나는 라신의 연극을 위해 맡은 배역을 소화해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스티앙과 클레르 역할을 두 배우의 퍼포먼스만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전자에는 캐릭터가 정해져 있다. 여기서는 라신의 희곡에 있는 배역들을 배우들이 자신의 몸과 발성을 통해서 재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배우의 물리적인 현존 안에서 그들의 소소한 퍼포먼스가 스스로 캐릭터를 구축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개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 안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전자의 경우보다 훨씬 시공간적 감각이 흐트러져 있다.


 이 영화에는 몇 개의 시간성이 있다. 운명적으로 주어진 시간이 있고(그것은 연극과 삶에서의 예정된 파국이다), 두 번째로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표현되는 달력화된 시간성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런 시간을 무화시키는 형태, 시공간을 무화하는 형태가 있다. 전체적인 시간과 공간이 흐트러진 형태의 느낌이 있는데,  이는 즉흥적인 배우의 퍼포먼스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시간성이라 할 수 있다. 완성에 대한 강박성이 없다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가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자 자유가 증가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영화는 파국을 향해 가지만 사실은 이 속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있다. 영화는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담아낸다. 다양한 시도와 가능성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흥미로움이 있다. 이렇게 실패와 불완전한 시도를 담아내려는 시도가 리베트의 영화를 길게 만들었다. 허용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가 담기기 위해서는 252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성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 영화 이후에 리베트는 <셀린느와 줄리 보트를 타러가다>를 만들었고, 12시간이 넘는 <아웃 원>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아웃 원>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몇년 전에 상영했는데, 꼬박 이틀 동안 상영했다. 전 세계에서 이 영화를 상영한 나라는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미치광이 같은 사랑>을 스크린에서 본 관객들도 많지 않다. 

 


리베트는 연극적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연극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영화와 대비시키면서 영화에서의 연극성을 끌어온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연극과 TV다큐멘터리, 영화가 함께 등장한다. 영화를 전체적으로 보면 연극 리허설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 리허설을 찍고있는 텔레비전 카메라와 그것 마저도 포함해서 촬영한 16mm 카메라가 있다.  그리고 둘의 삶을 담아낸 것은 35mm 카메라이다.  서로 다른 카메라가 연극과 삶의 픽션을 찍는 방식은 TV와 연극 그리고 영화가 크로스 되는 리베트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연극을 재현해가는 것이 아니라 라신의 희곡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 안에서 탐구를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카메라로 크로스 되는 방식은 현실의 사랑 속에서 라신의 비극을 되돌아보거나, 라신 연극이 현실의 사랑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이 되는  거울관계를 형성한다. 연극과 영화가 마주하면서 서로를 지켜보거나 비집고 들어가거나 날카롭게 잘라간다. 이런 거울의 상태는 서로 붕괴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연극과 연인의 사랑은 결국 깨져나가게 된다. 파국에서 제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고다르도 거의 동일한 시기에 <즐거운 지식>에서는 ‘영화의 제로로의 회귀'를 <중국여인>에서는 '영화의 연극영년'을 이야기했는데, 리베트 역시 이 영화로 자신의 영화적 영도성으로 돌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연극은 완성되지 못했고,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지만, 그래서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만, 리베트의 세계에서는 이 영화가 새로운 지점으로 출발점이다.

 

정리: 김고운(관객에디터) |사진: 주원탁(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