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하는 남자> 상영 후 정의진 교수와의 시네토크

 

지난 4 8일 낮, 알랭 로브그리예의 <거짓말하는 남자>의 상영 후 상명대학교 프랑스어문학과 정의진 교수와 함께 하는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소설가로 더 잘 알려진 알랭 로브그리예가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은 그의 문학 세계에 이어 필연적인 수순이었다고 정의진 교수는 말한다. 로브그리예의 문학 세계와 영화 세계를 넘나들며 누보로망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가 이루어진 시네토크 시간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정의진(상명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로브그리예는 50년대부터 <지우개>, <훔쳐보는 사람>, <질투> 등을 통해 누보로망으로 통칭되는 흐름을 형성했다. 누보로망 작가군 중 누보로망이라는 타이틀을 자기 타이틀로 인정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그래서 별명으로 누보로망의 교황이라 불리기도 했다. 누보로망이 정말로 새롭게 제기되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로브그리예가 매우 급진적으로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대립구도를 그리는 것은 리얼리즘, 사실주의의 전통이다. 대략 2차 대전 이전까지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소설의 사실주의적 전통, 인물을 구성하고 사건을 만들고 서사를 만들 때 그것이 일정하게 현실의 어떤 측면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진리가 반영된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에 대해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로브그리예는 실제로 과연 소설적 진실들이, 소설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리얼리즘의 입장이 자명한가 묻는다.

 

소설 『질투』의 배경이 되는 해외 영토령 마르티니끄 섬, 그곳의 한 프랑스 중간 공무원이 보는 자기 방의 모습, 하얀 벽면을 그 방 안에 있는 모든 오브제들을 로브그리예는 지겨울 정도로 반복적으로, 세세히 묘사한다. 이는 철저한 사실주의적 태도다. 벽의 미세한 얼룩, 책상 위 물체의 각도 변화 등 아주 미세한 변화까지 일일이 포착해서 묘사한다. 그러나 읽어가다 보면 균열이 발생하게 되는데, 기억의 문제 때문이다. 벽의 자국이 있던 자리가 바뀌고 모양이 바뀌고 책상 위 물체가 놓인 위치가 다르게 묘사된다. 소설적 사실주의를 비판적으로 점검한다고 했지만 이분법적 안티테제는 아니다. 그의 태도는 어떤 사실주의자들보다도 사실주의적으로써 묘사의 과정에서 천천히 현실이 파괴된다. 아무리 현실에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주관성을 거세하고, 있는 현실을 사실대로 보려고 해도 무너지게 되는데 그 계기는 시간성이다. 시간이 진전되면서 포괄적으로 역사가 형성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명했던 것들이 무너진다. 그 과정에서 로브그리예의 소설적 묘사와 사실성, 소설의 시간성에 대한 의심이 나타난다.

 

누보로망의 태도는 어떤 것이 진실이냐고 할 때, 즉 소설이 언어를 현실로 반영하는, 특히 사실주의적 태도로 진실, 진리를 목표로 할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성찰이다. 로브그리예는 이를 실험적으로 흔든다. 그가 소설가일 때 표명한 입장은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 감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의 소설의 근거로 삼는다. 자신이 묘사하는 대상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는 듯한 전략을 취한다. 그렇게 세세히 묘사를 하지만 결과적으로 역설에 도달한다. 분명한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대상이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문제는 자기 소설에서 분명한 진실들을 묘사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진실이 파괴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출발점을 자신이 허문다. 여기서 문학적이고 이론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그의 소설은 비평가적 성찰을 배경으로 한다. 결과적으로 크게 제시될 수 있는 범주는 진실과 거짓, 실재와 허구다.

 

 

제목처럼 영화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선언하고 시작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감추고 게임을 하는 게 아니다. 장 루이 트렌티낭이 나치 군대에게 쫓기다가 총을 맞아 죽는다. 그런데 후에 툭툭 털고 일어난다. 철저하게 거짓말이라는 전제를 하고 시작하는 장치들이 여러 군데 있다. 제목이 거짓말하는 남자지만 엄밀히 따지면 영화라는 거짓말, 거짓말하는 영화가 근본적인 제목이 될 것이다. 이야기차원에서 아마도 2차 대전 시기 레지스탕스 활동을 이야기 소재로 삼는데, 진짜 레지스탕스 활동이 있었는지, 레지스탕스 영웅을 고발했는지, 암살했는지 등의 이야기가 자기가 유혹하려는 여자들, 대상에 따라서 순간 순간 다르게 만들어진다. 이야기가 덧씌워져 나중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인물 차원이 아니라 영화 전체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거짓말인 것은 예를 들면 서사와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는 여러 장면들에서 알 수 있다. 장 루이 트렌티낭이 평소처럼 그 여관은 비어 있었다라고 이야기할 때 여관 1층선술집은 꽉 차 있고 장 로뱅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의 이야기 태도 역시 정확한 기억이 아니다.  서사 태도는 정확히 진실이라고 포착하기 어렵다.

 

물을 마시고 컵을 깨는 시늉을 할 때 실제로 컵은 존재하지 않지만 소리는 등장한다. 이미지와 음향이 일치하지 않고 대사와 이미지, 서사와 이미지가 엇갈리는 여러 장면들이 반복된다. 이는 뒤로 갈수록 심화된다. 일차적으로 인물의 거짓말은 매개이며 영화 자체가 거짓임을 보여주고, 근본적으로 이것이 허구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환기시킨다. 두드러지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음향 효과로, 음향을 크게 하거나 명료하게 음향을 첨가하여 브레송의 영화를 환기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브레송에서는 화면과 소리들이 일치한다. 로브그리예는 영화가 음향에 의해 조직된다는 영화의 구성을 인정하는 한편 활용하는 방식이 엇박자로 이루어진다. 마리아라는 하녀가 빨래 집게를 집을 때 종소리가 들리는 것이 바로 그 예다.

 

장 루이 트렌티낭은 유희적으로 거짓말을 하며 거짓말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진실을 말하겠다고 하지만 그가 유혹하지 못한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진지하게 연기한다. 한 여자한테는 장 로뱅을 죽였다고 하고, 다른 여자한테는 그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혹에 실패하자 새로운 연기 연습을 시작한다. 혼신을 다한 거짓말은 마치 연기자가 혼신을 다해 자기 역할을 연기하듯, 거짓말이라는 삶을 연기하는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후반부에서 사실은 내 직업이 배우다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삶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삶은 일정 부분 연기이기 때문이다.

 

윤리성에 대한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뜬금없이 원점에서 다시 거짓말을 시작하고 끊어졌던 이야기를 다시 잇고 있다. 이야기의 즉흥적인 변형이 이루어진다. 그의 목표는 여자를 유혹하는 것이지 이야기의 일관성을 얻는 게 아니다. 결국 그것이 이 영화 전체의 서사 구조와 연관이 되고 일반적 서사 구조인 기승전결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소위 현대적 구조를 보여준다.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결과적으로 현실이 다시 재구성된다. 만약 현실이 상당 부분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고 구성된다면 과거의 어떤 역사적 사건, 레지스탕스 저항, 거기에서 영웅시 된 레지스탕스 영웅들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여기서는 아주 부도덕한 태도로 구성된다. 현실 역사를 언어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자명하지 않다면, 자기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매우 분명한 도덕적 정당성과 희생자는 분명한 진실인데 복수적인 관점이 있는 것이다. 하나의 단일한 이야기, 단일한 사실들을 부정해야 한다고 할 때, 역사를 다른 각도로 구성한다고 할 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신화다. 공식 역사에서는 마치 런던에 있는 드골의 일사 분란한 지휘 아래 전국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처럼 묘사되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장 많이 참여하고 희생한 프랑스 공산당이 투쟁의 효율성을 위해 대표를 드골에게 파견하고 작전을 조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레지스탕스 운동은 사실상 자발적이고 지역적, 분산적이며 정당 초월적이었고 실제로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다. 또한 레지스탕스로 독일을 물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인들의 자존심, 연합국과 패전국에 자기 몫을 요구하기 위하여, 독일에 대항해 싸운 주체적이고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진 국가라는 정당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레지스탕스 드라마를 만들고 나치 부역자가 레지스탕스로 위장되기도 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예민하게 제기되고, 역사적으로 레지스탕스를 건드릴 때 제기되는 이념적 문제다.

 

영화 속 시공간은 2차 대전 때 체코의 작은 마을로 쉽게 연상할 수 있지만 이 역시 매우 애매하다. 동네 모습이나 사람들은 동유럽이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약국의 간판에는 체코어와 프랑스어가 동시에 써 있다. 시공간을 흩트려놓고, 정확하게 어디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디도 아니지만 대단히 보편적인 장소가 됨으로써 어디에 국한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로브그리예의 50년대 소설에 그가 정치적으로 냉소적이라는 공통된 평가가 있다. 어떤 외적인 대상으로 문학 언어를 환원시키지 않으려는, 철저하게 문학의 자율성과 문학적인 이야기 구성 자체의 독자성을 급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매우 새로운 소설이라는 평가다. 블랑쇼는 결론적으로 윤리에 대한 급진적 거부로 보았다. 가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로브그리예의 여러 영화에서 여성의 육체, , 특히 사도마조히즘적인 성이 등장한다. 사도마조히즘을 해석하는 방식은 역설적이다. 육체적이고 감각적 진실, 성이 자명하다면, 기존의 일반적 가치관이나 진리와 대립하는 지점이 그것이라면, 역설적으로 진리를 벗어나는 지점, 가학적 지점, 존재 자체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감각적 실체, 특히 로브그리예 영화에서는 여성의 몸인데 이것은 진리 자체를 무화 하는 블랙홀 같은 것이다. 사도마조히즘을 이해하는 방식은 존재론적으로 진리의 무화지점으로서의 육체와 성이다. 도덕조차도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버린다. 결과적으로 대척지점을 놓으면서도 그의 영화가 이분법적으로 비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윤리의 부재로까지 해석하는 것은 무리인데 왜냐하면 영화 상당 부분 거짓말하는 남자가 장 로뱅의 환영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는 이념적 가치, 사회적 가치, 억압자에 저항하는 가치, 나치에 저항하는 정차사회적 가치를 상징한다. 그를 가치 있고 공적으로 중요하며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해 로브그리예가 냉소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세기, 20세기 전반까지 소설은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에 걸치면서 일관되게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작품의 주제로 다뤘다.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사회비판적 작품이고 그 전통은 정통 문학에서 매우 길고 길다. 장 로뱅은 소설적 리얼리즘의 가치관과 태도, 사실과 실재성을 대표한다. 영화에서 강박적으로 거짓말하고 변주되고 죄의식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정도의 실재가 가정되어야 한다. 끝까지 영화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 것은 장 로뱅이 있다는 것 그 자체다. 아무리 탈피하려고 거짓말을 하고 자기 자신까지 속인다 해도 그 존재는 계속 돌아오고 실제로 마지막에서 일어난다. 어느 순간 허구로 만든 인물이 나타나 무너지기도 하고, 결국에는 다른 인물을 뒤섞고 경계를 허문다. 그 자체가 없다거나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누보로망을 위하여』에서도 보면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이냐 허구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사실주의가 아니라 사실성, 어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어떤 현실성이다. 궁극적 목표는 단순한 허구나 진실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묻고 그 자명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로브그리예의 영화가 있다.  

 

로브그리예는 자기 영화의 시나리오를 몇 편 출판했다. 사물의 존재, 즉각적으로 존재함이 사유의 출발점을 보다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미지지 언어는 아니다. 그의 작품 세계를 볼 때 그가 영화를 시도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그는 자기 시나리오는 작품이 아니라 단지 책이고 작품은 영화라고 했다. 그는 영화를 제작한 이후에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보완했다. 시나리오는 어디까지나 영화를 만들기 위한 사전적 작업이다. 그런데 일부러 책을 내기 위해, 영화라는 결과물과 대조하여 만들어진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때 그 텍스트의 위상은 어떤 것인가. 그럴 때 영화와 문학, 언어와 이미지라는 근본적 표현수단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영화는 즉각적이고 시각적인 감각이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언어적이고 논리적인 구성 작업이다. 반대로 문학은 결과적으로 다른 순서, 상대적으로 일정한 논리성과 가시적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을 통해 지각이 형성된다. 여기서 교차점이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내레이션, 서술, 묘사라는 문제를 문학적 중심 주제로 삼은 로브그리예에게 영화는 그가 시도할 가장 적절한 매체였다.

 

정리: 손소담(관객에디터) | 사진: 최미연(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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