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로지의 <하인> 상영 후 김영진 평론가와의 시네토크

 

지난 4월 13일 저녁 국내에서 처음 상영되는 조셉 로지 감독의 <하인> 상영 후 김영진 영화평론가와 함께하는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조셉 로지 감독의 필모그래피부터 영화에 대한 해설까지 흥미롭게 들려준 그의 영화에 대한 해설을 여기에 옮긴다.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영화 재밌지 않나? 임상수 감독의 <하녀>와는 정반대 결과를 갖고 있는 영화다. 아마도 1960년대와 2010년 이라는 시대적 차이 때문 일거다. 김기영 감독이 <하녀>와도 유사성이 있다. 동시대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유사한 주제의식을 갖게 됐는지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다.

조셉로지의 필모그래피는 유럽에서 꾸준히 영화를 찍은 덕에 상당히 다양한 편이고 수준도 들쑥날쑥한 편이다. 퇴작도 좀 있고 그렇지만 지금 본 <하인 The servant>이나<사랑의 상처 Accident>는 두말 할 나위 없는 그의 최고작 중 하나다.

 

조셉로지 감독은 미국 감독인데 좌익 쪽에 관심이 많아서 러시아에서 영화를 했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에게서 사사를 받기도 했다더라. 상당히 레드컬러에 있던 사람이라는 얘긴데, 50년대 초에 B무비 몇 편을 찍은 다음 매카시 광풍이 불 때 증언하기를 거부하고 유럽으로 망명했다. 돌이켜보면 미국에 있는 것보다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유럽에 갔을 때 네오리얼리즘이 한바탕 지나가고 영화 사업이 부흥할 무렵이어서 소위 모던시네마가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안소니 퀸의 자서전을 보면 매우 재미있는데, <길>이후 치네치타 스튜디오가 있는 거리의 수많은 카페에는 전 세계 영화인들이 다 모여 있었다더라. 여기서 펠리니 감독이 ‘내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200미터 가는 동안에 몇 명의 프로듀서들이 나한테 딜을 제안을 하는 지 나랑 내기 할래? 몇 명 이하면 누가 술값을 내고’라고 내기를 했는데 펠리니가 이겼단다. 그럴 정도로 유럽 영화산업이 좋을 때였는데 누벨바그가 나오고 무엇보다 그런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들이 있었을 때 조셉 로지가 건너간 거다. 사실, 굉장히 영화가 지적이고 지식인 관객들이 매우 좋아할만한데다 그런 시대적 흐름을 만나면서 일년에 한 번 꼴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고 지금의 대표작들도 많이 나오게 된 거다.

 

이 영화는 보여 지는 것, 들려지는 것 등 모든 레이어에서 우리들에게 말을 건다. 영화 처음 시작부분, 토니에 집에 갔을 때부터 모든 앵글이 극적이다. 전경과 후경에 인물을 놓고 거리를 강조하는 앵글을 매우 많이 사용 한다. 전경에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 우리를 보고 있으며 깊이감이 강하게 잡혀있는 구조로 구도가 잡혀있다.

초반에는 토니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며 공간의 지배권을 계속 갖고 있다. 수돗물 똑똑 떨어지는 그날 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와이드로 거리를 두고 공간감과 부피감이 유지가 되는데 토니하고 수잔이 항상 점유권을 갖고 있는데 계속 휴고 바렛이 끼어든다. 상황적으로도 끼어들지만, 아까처럼 노크 안하고 들어오듯. 그럴 때도 구도 상으로 문이 열려있고 거울로 토니하고 수잔이 있을 때 아직 안 들어온 상태가 보이는 등으로 그들의 구도에 바렛의 계속되는 침입의 모티브를 시각적으로 강조 한다. 수돗물 떨어지는 그 날 밤 이후에 조금씩 역전되는데 이후 수시로 바뀐다. 이미 그때는 이미 영화 중반까지 확립된 지배권의 우열관계는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조명을 굉장히 특이하게 해서 토니가 앞에 있어도 우월한 느낌이 아니라 불쌍해 보인다. 극적인 앵글 하에서 거리를 강조하는 공간의 깊이감을 통해서 지배관계 전복이라는 이 영화의 주제를 말하고 있다.

또 이 영화에 거울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거울이 있으면 거울에 비친 인물을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화면 속 인물과 같은 위치를 차지함으로서 동일화되기 쉬운 앵글이다. 토니같은 경우 굉장히 강해 보이는데 귀족이고 유산을 받았고 출신도 좋고 상류층인데 굉장히 단단해 보이는 그의 정체성이 사실 굉장히 연약하다는 것을 계속 구도 상으로 암시하고 있다. 또 그 빛과 조명이 서양식은 우리와 달라 굉장히 그림자를 많이 쓴 걸 알 수 있는데 가령 심야에 들어왔을 때 그림자가 말을 한다. 당당하게 그림자가 말을 하고 심지어 토니를 압도하고 있다. 또 사운드나 연상효과도 잘 쓰고 있는데 후반부에 숨바꼭질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장면은 저항할 수 없었던 그날 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 다음 신이 비가 오면서 그 물줄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또 악마 같은 여자가 찾아와서 다시 연극을 하고, 그 때 조명이 어떻게 그렇게 비가 오는 와중에 인물의 그림자를 불규칙하게 흐르는 하는 지. 이런 식으로 이전에 반복되어 왔던 것들이 연상 작용을 일으키며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며 시청각적 효과들이 상승하는 굉장히 공 감각적이다.

또 부자 집에만 있는 많은 그림들과 사진들을 이용한 구도들도 있다. 초반에는 전형적인 귀족적 초상화들, 정돈돼있고 권위적이고 단아한 것들 위주로 프레이밍을 많이 하다 나중부터는 훨씬 음침하고 현대적인 그림들이 프레이밍이 많이 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이 집약되어 소용돌이치는 것이 마지막 파티장면 씬이다. 일단 파티 장면 자체가 그림의 한 장면처럼 구도가 잡혀있고 여자들이 옷도 그렇게 입고 있다. 마치 귀부인들처럼. 하지만 근데 전부 광기에 제정신으로 안 보인다. 그게 어디 파티에 가는 사람들처럼 보이나. 카페에서 봤던 그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좀비처럼 앉아있고. 초반에 보여줬던 귀족사회의 단아함 권위 우아함 이런 것들을 보여줬던 구도로 앉아있는데 그 내면은 정 반대인 그런 프레임으로 앉아있고 정중앙에 문제의 그녀 베라가 거울 앞에 있다. 사건의 지휘자는 바렛이지만 실행자인 그녀. 여기서 수잔의 캐릭터도 매우 재밌는데 처음 수잔은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 나올 정도로 싸늘하게 생겼고 직감도 좋다. 하지만 수잔도 무너지고 만다. 그런 식으로 기존에 갖고 있었던 아이덴터티가 다 허물어져버리는 이런 것들을 이 서사적 흐름 말고 시청각적인 것을 다 동원해서 관객들을 설득을 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무너지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저것이 당시 시대적 분위기였던 것 같다. 영국이란 사회는 사실 완강한 계급사회이고 지금도 그 틀이 유지되고 있는. 우리는 아직 집안 따지고 그런 건 남아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왕족이 다 망했고 수직 이동이 굉장히 심했던 사회를 살지 않았나? 20세기엔, 요즘엔 우리도 계급사회가 됐는데. 저 사회는 수직이동이 불가능한 고착된 사회인 거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라는 유명한 문화 평론가이자 문화이론가가 있는데 그분이 노동자의 아들인데 옥스퍼드에 들어갔다. 그런데 레이몬드 아버지 친구들이 레이몬드 아버지와 레이몬드를 비난했다더라. 너는 노동자의 자식이 왜 대학에 갈 수 있었고 또 옥스퍼드에? 우리 같으면 동네잔치 하고 했을 텐데 거긴 오히려 거꾸로 자기 계급에 프라이드를 갖고 살아가는 사회였던 거다.

 

60년대는 모든 것이 해체되는 사회였고, 60년대 후반에 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그 유사혁명의 기운을 생각해보더라도 그 전까지 여러 가지 전조들이 있었겠다. 영국사회도 분명히 그런 게 있었고, 비틀즈가 나오고 흔들리는 런던 이런 얘기가 있었듯이, 그런 식의 시대적 맥락과 조우하면서 또 이 조셉 로지는 막시스트였기 때문에 그런 얘길 한 거 같다. 가만이 보면 그들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요인이 있었다. 우리의 추론으로도 엄청 경계가 심하지 않은가. 저 계급은 조금만 프레임에서도 벗어나면 안 되는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굉장히 단단함으로 뭉쳐진 폐쇄성이 아니고 사실은 굉장히 연약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일단 저 휴고 바렛도 굉장히 겉으로는 빈틈없는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허물어지지 않나? 자신의 정욕에 무너진 거다. 애인한테 준비가 안 됐는데도 떠나자고 한 건 자기 자신을 추수를 수 없는 것에 대해 안간힘을 쓰는 거다.

 

그리고 집을 나와서 보면 여동생도 아니었고, 우리가 갖고 있는 모럴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다. 그날 밤엔 그리고 약혼녀와의 관계도 깨지고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기존의 자기 생활과 다르게 완전히 폐인처럼 살게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인물은 자발적인 생명력이 없다. 그걸 암시하는 모습이 난간에 프레이밍 되는 모습이 감옥에 갇힌 것 같이 보이고 그 안에 내적인 생명력이 전혀 없는 인간으로 주인공을 그려내고 있다. 그에 비하면 되게 야비하고 비열하지만 무서운 남녀 주인공인 토니와 베라. 이들처럼 감당 안 되는 캐릭터들은 사실 지금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웃음) 굉장히 욕망에 충실하고 카멜레온 같이 변하는데 모럴이 없다. 대신 굉장한 생명력이 있는 건데 토니는 이런 생명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점점 퇴행한다. 그래서 마치 엄마 젖을 먹듯 술을 먹으면서 유치한 어린애들의 놀이를 하게 된다.

조셉 로지라는 감독은 당시의 영국의 유한계급의 내부를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것으로 봤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영화의 외부, 텍스트를 감싸고 있던 당시 사회의 콘텍스트가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그런 기운이 있지 않았나 싶다. 예민한 숙주처럼 조셉 로지라는 감독이 그걸 영화화 한 거고, 그게 그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킨 거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고전이 된 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다.

 

 

김기영 감독님의 <하녀> 같은 경우는 조금 다르다. 거기에서도 여전히 침입의 모티브가 중요하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관계도 중요하며 그건 거의 모티브가 똑같다. 근데 사회적 맥락에서 다른데, 당시 우리나라는 사회적 중산층이라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이층집을 짓게 되고 그리고 거기로 이사를 가는 집안이, 와이프가 열심히 삯바느질 하고 있고 남편은 피아노 알바하고 있는데 고객이 여공들인 웃긴 상황이 연출된다. 이런 중산층이면 얼마나 허약하겠는가. 그 허약한 내부 안에 팜므파탈이 들어가 무너뜨린 거다. 근데 얘기가 되는 게, 그 당시에 사회문제가 굉장히 많았다더라. 식모 때문에 패가망신한 가장들이 많았다던데, 당시 신문 사회면에서. 영화 볼 때 낮에 가면 아줌마들이 많았는데 이쪽은 주인아줌마 이쪽은 시장 보러 나온 핑계인 가정부들로 웃지 못 할 장면들이 연출되기도 했다더라.

 

비슷한 주제의식과 모티브를 갖고 있지만 그 토대는 다르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는 이 영화에서처럼 극적인 앵글보다는 시각적 모티브를 굉장히 많이 사용했다. 미닫이문이 열리면 안방이 펼쳐지는 장면은 엄청난 미장센 효과를 발휘하고 있고, 담배 연기를 남자 얼굴에 뿜을 때 마치 영토 확장을 위한 침입처럼 담배 연기도 매우 잘 쓰고 있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원작에 대한 리스팩트가 없다. 현재는 그게 안 통한다고 생각한 거다. 첫날 밤 이후 이정제가 출근하기 전에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동침을 했으면 대부분은 여자가 심리적 지배권을 갖고 있다. 이런 얘기하면 또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생각을 추론 해보자는 거다. (웃음) 자신만만하게 음식을 해서 가는데 그런데 이정재가 쳐다보지도 않을뿐더러 거기서 오히려 피아노에 압도를 당한다. 너는 내 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시위하고 있는 거다. 그 재벌2세가 그리고 돈을 주면서 게임은 끝난다. 그 김기영의 하녀와는 전혀 다른 영화가 돼 버린 거다. 그 계단 모티브도 김기영 영화에서처럼 안 쓰이고 이동이 안 되는 의미로 그리고 그 것을 계속 또 강조하고 있다. 시대가 다르다는 거다. 그 쪽 계급 자체가 난공불락인 거다. 결국은 자살 퍼포먼스 한 거 밖에 없게 된다. 이게 임상수가 보는 200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라는 거다. 김기영의 하녀와 전혀 다른, 대신에 임상수 감독은 특유의 시니컬한 장면을 마지막에 남겨 놓는데 ‘결국 이런 니들 별거 없다. 그렇게 살아봐야 맑고 천진했던 애를 괴물로 키우는 거 밖에 더 해?’라는 잔인한 저주의 논평을 엔딩에 해 놓고, 그 전에는 영화 맨 처음에 나왔던 자살하는 여자처럼 전도연도 자살을 시키고 끝을 맺는다. 그게 2000년대 후반의 한국사회라는 건데 일리 있는 해석이라고 본다.

 

그렇게 각자의 시대적 콘텍스트를 갖고 나온 영화들인데 조셉로지의 <하인>이라는 영화는 그 당시의 60년대의 시대적 문맥에서 굉장히 시사적인 파워를 갖고 있고 이 분이 이런 유형의 소재를 매우 능숙하게 다룬다. 제가 이분 영화 중에 또 좋아하는 게 <미스터 클레인Mr. Klein>이라는 영화인데 알랭들롱이 나오는 영화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영화다. 알랭들롱이 조셉 로지 감독을 모셔다가 영화를 제작을 하고 자기가 주연을 했다. 영화에서 알랭들롱은 아주 악질적인 미술골동품 수집가이고, 유대인 잡아들일 때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고가품들을 헐값에 사들이면서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런데 자신과 똑같은 이름인 유대인인 클라인이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주소를 그쪽으로 이전을 해 놓음으로써 알랭들롱은 자신이 유대인이 아님을 확인하러 다니는 과정에서 오히려 유대인 클라인의 아이덴티티를 점점 알아가게 된다. 유대인 클라인은 자기와 정 반대로 살았다. 친구도 너무 많고, 굉장히 지적이고, 자기의 거울 같은 걸 보는 건데 결국 나중에 두 사람의 아이덴티티가 섞인다. 그래서 주위의 도움으로 나올 수도 있는데 유대인 클라인의 안위가 궁금해서 또 수용소로 간다. 친구가 말리는데도 자꾸 유대인 클라인의 뒤통수를 쫓아 들어가지만 결국 그곳에는 온통 유대인 뿐, 그것을 보고 내가 왜 이렇게 됐지? 라며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도 <하인>처럼 거울 미장센이 엄청 나온다. 어디 갈 때마다 있다. 거울을 보면서 알랭들롱이 나중에 거울에 있는 게 자기인지 의심하는. 사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굉장히 강력한 거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지만 그게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에 대해서 그 복합적인 추론에 관해서 감독은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조셉로지 감독은 막시스트였으니까 당연히 사회변혁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현대사가 어떻게 보면 좌파들에게는 좌절의 역사이지 않은가. 소비에트 공산화가 됐는데 스탈린 이후에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을 때도 프랑코가 이겼고 이럴 때 60년대 말에 로지가 이런 인터뷰를 했다. 스페인 내전이 지난 한참 후에 50년대 초반인가 스페인 내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는데 어떤 정갈한 사람이 세상은 선과 악 좋은 놈 나쁜 놈 이런 식으로 구성돼 있지 않고 굉장히 복잡하다. 지당한 명제이기는 한데 그 당시 감독에게는 굉장한 충격을 줬단다. 앞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이 세상의 중층적인 그런 면을 탐구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자기 작품세계에 기초를 세우는 데 중요한 원칙이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식으로 아이덴티티의 교환 경쟁 전복 등이 개인적인 것이 아닌 소사이어티 내에서 가정 내에서 관계 내에서 굉장히 다양한 레이어로 펼쳐지는 것들을 즐겨 다루고, 그럴 때 이 조셉 로지 감독의 뛰어난 비쥬얼 스토리텔링이 빛을 발했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관객1: 다른 영국배우들 연기는 자주 봤지만 더크 보가드라는 배우는 거의 못 봤는데 오늘 보니까 연기 매우 잘 하더라. <나이트포터>에 출연한 걸로 아는데 그 외에 다른 출연작과 경력에 대해서 알고 싶다.

김영진: 제일 유명한 출연작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거기서 시한부로 죽어가는 말로를 연기한다. 사실 저런 식의 마스크와 감성을 갖고 있는 배우는 흔치 않았던 것 같다. 남자지만 굉장히 섬세한 모습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굉장히 악하게 보일 때와 굉장히 연약하게 보일 때가 둘 다 어울리는 그런 유형의 마스크와 연기력을 보여 준다. 조셉 로지 감독의 영화에 많이 출연 했다. 더크 보가트는 로지의 사회주의 사상에는 절대 공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너무 헌신적으로 잘 해 주니까 조셉로지가 너무 고마워했다는 후문이다. <베니스에서 죽다>는 말러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비스콘티 이야기이기도 하고, 자기가 많이 투사된 거다. 두 개의 자아가 있는데 그 영화에는. 토마스 만의 소설 그대로 말러가 주인공이지만 비스콘티도 영화 찍을 때, 쇠약해서 휠체어에 타고 연출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 보면 줌이 굉장히 많은데 예전 같으면 트랙으로 다 했을 것을 앉아서 했기 때문에 줌으로만 당겨 찍었다더라. 더크 보가트가 연기 하는 인물은 늙은 말런데 페스트가 창궐하고 있는데 베니스와 와서 휴양을 한다. 그러다 너무 아름다운 미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그저 먼데서 보기만 한다. 말 한마디도 못하고. 그게 영화의 내용이다. 그 생명력에 반하는 거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이 바닷가에서 역광을 받으면서 서있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를 보면서 눈을 감는데 해변 가에서 너무너무 잘 어울린다.

 

관객2: 거울이나 그림자 조명, 이런 기법을 얘기해 주셨다. 영화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게 사람의 신체 중에서 발이 에로틱한 분위기로 부각이 되더라. 신체 일부 중에서 왜 발이 이렇게 부각되는지 궁금하다.

김영진: 페티쉬라 한다. 신체 일부에 대한 패티쉬. 우리가 욕망을 느낀다고 할 때, 몸 전체로의 사랑이 아니라 어떤 인화점이 있지 않은가. 구두나 긴 손가락, 손톱만 보면 미치는... 로지 감독은 발에 대한 페티쉬가 있는 것 같다. 공중전화에서 베라에게 전화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여자들인데 발을 보지 않는가? 영화 처음 볼 때 관객들이 깜짝 놀라는데, 욕설을 퍼부으니까, 근데 이런 반응은 욕망을 느끼는 거에 대한 역반응일 수 있다. 바렛의 시점으로 본 그 샷이 있었기 때문에 비치라고 하는 것으로 그의 마음에 성냥불을 그은 것이다. 베라도 마찬가진데 그런 구도를 봤을 때 화면상의 논리나 전조로는 베라의 발 때문에 틀림없이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감독들은 패티쉬가 있다. 음악도 블루스와 재즈를 쓰고 가사도 퇴폐적이면서도 매혹적이다. 뭔가 영화 전체가 느낌이 관능적이다.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다루고 있는 주요 사건도 그것 때문에 다 사단이 일어나니까.

 

정리: 김준완(관객에디터) | 사진: 최용혁(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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