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의 거장 안톤 체호프

지난 7월 30일 오후 안톤 체호프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베짱이> 상영 후 ‘2011 시네바캉스 서울’의 첫 번째 부대행사로 '안톤 체호프와 문학'이란 제하의 특별강좌가 열렸다. 강사로는 체호프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오원교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가 나서 ‘단편소설의 거장 안톤 체호프’란 주제로 체호프 문학의 특징에 대해 열띤 강연을 펼쳤다.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전한다.


오원교(모스크바 국립대학 박사,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 이번 ‘시네바캉스 서울”에는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다섯 편의 영화가 소개된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영화에 대한 분석보다는 체호프와 그의 문학, 특히 소설을 중심으로 이야기 나누려 한다. 톨스토이가 한 말이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체호프를 좋아하고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누구나 체호프를 읽으면 자기 나름의 체호프를 가지게 된다. 문학작품을 가지고 영화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원전에 대해 자기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읽어내게 된다. 체호프는 총 900여 편의 작품을 썼는데, 그 중에 62편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많은 경우는 소비에트 시대에 국가적인 정책으로 국영영화사인 모스필름에서 만들어졌고, 그에 따라 원작에 대한 해석에서 알게 모르게 시대적인 맥락이나 분위기가 반영 된다. 오늘 보신 <베짱이>의 주인공 드이모프는 또 다른 체호프로 표현되었다. 이 영화는 삼소노프라는 감독의 데뷔작인데, 영화에 체호프의 문학관이나 인생관을 아주 잘 버무려 놓은 것 같다. 체호프가 가졌던 삶의 자세 같은 것들이 영화에서 표현된 주인공과 많이 닮아있다. 체호프와 관련된 기념비나 박물관에 가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말이 그 자신이 쓴 “공공의 선에 복무하려는 바람은 언제나 영혼의 요구여야하고 개인적 행복의 조건이어야 한다”이다. 드이모프의 삶과 올가의 삶을 비교해보면 그들의 행복의 조건이 어디를 향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체호프는 1860년에 작은 항구도시에서 태어났다. 19세기는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다. 푸쉬킨부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거장들이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짜르체제에서 글을 썼다는 건데, 그건 유한계층만 가능했다. 체호프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작가들은 귀족출신이라는 얘기다. 체호프는 할아버지가 농노출신으로, 천한 출신의 최초의 작가이다. 할아버지가 돈을 모아서 농노해방이 되기 전에 일종의 노비문서를 사서 태우고, 아버지 대부터 자유인이 되었다. 상인이었던 체호프의 아버지는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기도 했는데, 가족성가대를 조직해서 체호프의 형제들을 교회에 세워 노래를 하게 했다고 한다. 체호프에게는 그런 경험들이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의 작품에는 단 한 번도 순수한 의미에서 교회나 종교가 나오지 않는다. 그가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종교를 갖지는 않았다.

체호프는 1879년에 모스크바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1980년대부터 필명으로 유머 잡지들에 콩트 등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해진 원고료에 따라 정해진 행에 맞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요구하는 것에 맞게, 짧고 간략하게 글을 써야했는데, 이는 단편작가로서 체호프를 체호프답게 만드는 일종의 수련기간이였다. 체호프는 스스로 ‘간결함은 재능의 누이이다’라는 말할 정도로 간결함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와 더불어 작가의 절제성은 체호프의 중요한 특징이다. 하지만 체호프는 애초에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의학을 대단히 중요한 학문으로 여겼고 더군다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실증주의 과학에 모든 인류가 진보의 희망을 걸었던 시기였기에 의학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과학이 최고의 학문이었다. 체호프는 ‘의학은 나의 아내이고, 문학은 나의 연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의학과 문학이 체호프에게서는 왜 하나인지가 중요하다. <베짱이>에는 드이모프가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어. 의사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치료해야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은 세상의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치밀하게 결합되어 있고 총체적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사람의 운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체호프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1886년에 안톤 체호프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작품을 내고부터, 그는 문학계와 연극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880년대라는 시기는 러시아문학사에서는 퇴락의 시기였다. 투르게네프나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거장들이 죽고, 톨스토이는 당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같은 자신의 명작들을 두고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던 시기였다. 문학의 공백상태였던 시기에 체호프라는 뛰어난 작가가 나타난 셈이다. 첫 번째 단편집이 푸쉬킨 상을 받는 등 비평계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작품에 대한 비판들도 존재했다. 작품에 이념이나 사상, 예술적 구성이 없으며, 그저 일상의 연대기를 그릴 뿐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체호프 이전의 작가들은 성인에 가까운 사상가들이었고, 그들은 러시아 인민들에게 그들이 나아갈 바를 전지적으로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체호프는 그것이 과연 러시아가 나아갈 길을 제대로 밝혀주는가라는 반성에서부터 시작했다. 체호프는 오히려 그를 비판을 하는 평자들이 기대하는 톨스토이주의나 대지주의는 교조이고 독단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해방운동, 변혁운동이 높아지던 시기였고, 인민주의 운동, 맑스주의와 같은 것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데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가 모든 이들의 관심사였다. 체호프도 바로 그런 시대적 과제에 대면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890년, 서른이 되던 해에 느닷없이 사할린 여행을 떠난다. 사할린은 시베리아와 함께 강제노역과 유형의 땅이었는데, 그래서 실제로는 여행이라기보다 순례에 가까운 체험이었다. 그는 사할린과 관련된 엄청난 분량의 자료들, 다른 이들의 글들을 꼼꼼히 분석한 뒤 사할린으로 떠났다. 이 여행은 체호프의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이 된다. 모두에게 사할린은 외면하고 싶은 곳이었는데, 체호프는 도대체 사할린은 어떤 곳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체호프와 동시대의 작가이자,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 『6호실』을 쓴 레스코프는 ‘도처에 6호실이 있다. 6호실이 바로 러시아다’라고 말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사할린이 바로 러시아였던 것이다. 강제와 억압, 탄압, 비인간이 존재하는 곳. 체호프는 직접 그곳의 실상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즉, 러시아인 중 누구도 이 사할린적인 상황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그는 사할린에 관한 다른 글들과 자신의 경험을 비교하게 되면서 결국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이는 체호프 문학의 요체라고 생각된다. 사할린을 다녀와서부터 체호프의 사회인식은 상당히 깊어졌고, 의료교육이나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보통 체호프는 사회적인 부분과는 거리가 먼 작가로 얘기되곤 하는데,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체호프 문학에 대해서 ‘온 세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글쓰기다’라고 했다. 체호프 문학의 방법 내지는 예술성을 평가한 말인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가 했던 이 말이 어떤 의미일까에 매달리고 있다. 체호프 문학의 요체는 ‘문제의 올바른 제기’라고 할 수 있다. 체호프는 작가는 심판관이 아니기 때문에, 인물을 만들어내지만 그 인물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진 않는다고 말했다. 오늘 <베짱이>를 보신 분들이 탄식도 하고 많은 반응들을 보였는데, 체호프의 작품을 읽어보면 그러한 탄식은 행간에도 없다. 체호프는 작품 속에서 올가 이바노브나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드이모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체호프의 모든 작품이 그렇다. 그런 면에서 톨스토이와는 반대다. 톨스토이는 너무나 독백적이고 독단적이다. 그의 작품은 글 안의 전지적인 작가의 말만 읽으면 앞으로 주인공이 어떻게 될지 뻔하다. 체호프는 작가는 ‘불편부당한 목격자’이어야 하고 심판관은 독자여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문학에서 최초로 독자의 역할에 대해서 공동의 창작자라고 생각했던 작가가 체호프이다. 따라서 작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올바른 제기’라는 것이다. 체호프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에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독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독자들이 답을 하는 것이다. 체호프는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체호프는 스스로 자신이 휴머니스트이며, ‘나의 믿음은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주원탁(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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