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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바캉스 서울/Cine Talk

[영화사 강좌]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현대성 ❷

로버트 알드리치, 남성적 허세와 유희

‘2011 시네바캉스 서울’이 한창인 지난 8월 7일 오후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피닉스> 상영 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현대성’이란 제목의 영화사 강좌 두 번째 시간이 이어졌다. ‘로버트 알드리치, 남성적 허세와 유희’를 주제로 열린 이 날 강좌에 강사는 오승욱 감독이 자리하였고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가 함께 진행하며 흥미로운 대담을 펼쳤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진행은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가 맡았다. 남성 영화에 대한 애호와 <피닉스>에 대한 흥미로운 지점들을 앞 다투어 이야기하며 열띤 대화의 장을 펼친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올해 초에도 로버트 알드리치의 영화 <북극의 제왕>을 추천해서 상영했고 <피닉스>도 함께 추천해주셨지만 당시에는 상영하지 못했다. 대신 여름에 <피닉스>가 걸맞을 것 같아 이번에 틀게 되었다. 오승욱 감독을 소개한다. 말씀하신 대로 정말 초등학교 2학년 때 이 영화를 보셨는지?
오승욱(영화감독): AFKN에서 봤고, 김산이라는 만화가가 있는데 이걸 ‘불사조 날아오르다’라는 제목으로 만화화하기도 했다. 주인공 소년이 헹글라이더를 만들어서 탈출하는 것으로 나온다.

김성욱: 영화는 남성의 몰락을 얘기하고 있다. 여러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하는 것과 사막이라는 공간이 흥미로웠는데 어떠셨는지?
오승욱: ‘남성의 허세와 유희’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60년대 중반 이후 알드리치의 영화는 50년대 영화와 다르게 ‘남성들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한다.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남성을 얘기하는 미국 영화감독이 둘 있다. 물론 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남성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감독들도 있다. 하워드 혹스와 존 포드가 대표적인데 존 포드는 남성들의 얘기를 할 때 그들의 존엄성을 얘기한다. 그는 결정적인 클로즈업을 한두 번 밖에 안 쓴다. 남성이 윤리적 결단을 내렸을 때 그 존엄성에 대한 존경을 담으려 한다. 한편 하워드 혹스는 주인공들의 관계 속에서 남성의 섬세한 면을 다룬다.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담아낸다. 50년대까지 미국영화의 이러한 남성상을 샘 페킨파와 로버트 알드리치가 바꿔놓는다. 이 영화에서 결정적인 클로즈업은 부조종사인 리처드 아덴보로가 기장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싸우면서 무식함을 지적할 때 쓰인다.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알드리치의 남성상에 방점을 찍는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알드리치는 남성으로서 버텨왔던 세계가 무너질 때 그 남성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를 얘기하고 싶어 한 것 같다. 페킨파의 경우 남자를 아름답게 보여줄 때는 남성들이 제정신이라면 도망가야 하는데 무언가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해서 죽으러 갈 때다. 용기 있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는 게 아니라 바보짓하는 남성들에게 만가를 바친다고 해야 할까. 알드리치와 페킨파는 그 이전과 다르게 남성들의 비애를 담았던 것 같다.

김성욱:
이 남성들만이 등장하는 영화에 특이한 장면 중 하나가 후반부에 신기루처럼 여자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다리를 부상당했던 친구가 부인 사진 한 장을 떨어뜨리고 죽는 장면과 더불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부인 사진 가졌던 사람이 죽고 중사는 여자의 신기루에 사로잡히고 플레이보이 잡지를 보던 사람과 기타 치던 사람은 초반에 죽어버린다. 이런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오승욱: 남성 얘기를 하다보면 여성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좋아하는 남성 영화들에는 남성이 여성을 학대한 것에 대한 죄의식과 그 여성이 언제든지 자신을 박살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그것이 남성의 동력이 되고 폭발한다. 레오네와 페킨파, 마틴 스콜세지의 70~90년대 영화가 그렇다. 여성에 대한 죄의식과 두려움을 다룬 이들 작품들에서 여성이 부재하더라도 그 여성의 귀기라는 것이 남성들을 계속 괴롭힌다.

김성욱:
몇몇 배우들은 그들의 내력과 영화가 연동되는 것 같다. 하디 크루거는 어릴 때 히틀러 소년단이었고 2차 대전에 참전했고 이후 영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도 2차 대전 때 비행기 조종사로 활약했고 초반에는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에 나오다가 나중에 안소니 만이나 히치콕의 영화에서 굉장히 히스테릭한 인물로 등장한다. 또 젊은 세대인 크루거를 보면서 “앞일을 이끌어가겠지만 미래를 못 볼 것 같다”고 한다. 한편 중사는 이런 식의 재난 영화에선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캐릭터다. 내러티브의 도덕적 논리로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중사를 비겁하다고 할 수 있지만 대위를 아버지로서 바라봤다는 느낌이 든다. 어머니가 생일에 팬케이크을 만들어줄 때 아버지는 자기를 군대에 보냈다. 그래서 중사가 대위 앞에서 가부장성에 대한 반항을 표출한다고 보았다. 군인으로서는 비겁하지만, 아버지에 반항하는 아들의 입장에선 강한 모습이다. 속 내용은 결국 자기 죽기 싫다는 건데, 다른 한편으론 ‘그 때는 반항 못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오승욱:
50년대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는 남성을 얘기할 때 아버지 아들 손자 이렇게 얘기한다. 60년대 들어서 알드리치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없다. 아들도 없다. 알드리치도 자기 아들을 플레이보이 보는 배우로 출연시켜서 곧바로 죽이지 않나. (웃음) 아버지 아들 손자 이 얘기는 60년대 남성을 다룬 영화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다. 알드리치나 페킨파에서 남성들의 관계는 일 때문에 혹은 싸움 때문에 전장에서 맺는 관계이다. 횡적인 관계다. 70년대에 보수로 돌아선 영화가 <대부>이다. 코폴라는 아버지 세대를 복원한다. 관계 속에서 남자를 다루는 것이 진보라고 하긴 그렇지만, 아버지 없고 아들한테 물려주는 것 없고 자기들끼리 놀다가 자기들끼리 폭사하는 것이 <대부>나 폰다 가족들이 찍은 <황금 연못>보다 인상적이다. 알드리치의 이 영화도 그런 점에서 대단히 매력적이다. 허세라고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온갖 허세가 총출동한다. 대표적인 것이 ‘괜찮아 잘 될 거야’ 식이다. (웃음) 위기를 위트 있게 표현한다. 리처드 아덴보로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싸우는 장면이 있다. 서로 삐지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아 루... 루... 미안해’ 하면서 후회하고, 루는 축 처진 어깨로 가고 있고, 그 다음 혼자 있는 아덴보로한테 스튜어트가 가서 아무도 안 웃을 농담 하면 서로 용서하는. 이 영화는 그런 것의 총집합이다. 지금 봐서는 비웃음 밖에 안 된다. 싸우면 그 다음날 안 보지 않나. 상처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진 않지 않나. 알드리치 영화에선 둘이 힘을 합쳐서 가야하니까 그렇게 한 거고 또 그런 식의 화해 직후에 안 좋은 일들이 터진다. 서푼짜리 위안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없는 것을 곳곳에 배치한 게 좋았다. 특히 영화 다 끝날 때 와서야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을 하디 크루거가 모형 비행기 만들던 사람이라는 말로 다 무너뜨려버린다. 노동자들도 비웃음거리로 그려지는데, 남성이 노동으로 존재한다는 가치가 일차 대전 후부터 서서히 없어져버렸다. 남성 노동의 가치가 당대 미국에서 의심받고 있었고, 우리나라도 이천 년대 들어서 계속 해서 의심받고 있지 않나. 자본가와 서비스하는 사람만이 의미 있을 뿐이다. 흙을 파내고 엎는 것과 무엇을 만드는 것에 가치가 없다고 보고 있다. 당시 미국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의 가치를 잃어버린 그 사람들이 노동하고 있다. 다들 구조되고 나서도 특별히 희망이 없는 것 같다. 중사는 구속될 것이고 하디 크루거는 앞으로 모형 비행기를 만들고 있을 것이고 여태 그나마 가치 있었던 노동 역시 우스갯거리가 되어버렸다. 영화 마지막에 그들은 살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운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물을 향해 찾아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 놈들 술 처먹었냐’고 한다. 알드리치가 생각하는 갱생을 해봤자 술주정뱅이로 살거나 요행히도 육백 미터 가서 살고, 그러고 나서도 물 먹는 것 말고 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웃음이 드러난다. 동시에 감동적이기도 하고.


김성욱: 그 부분을 보고 유희적으로 반응한다고 생각했다. 탈출 후를 과장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들이 큰일이지만 하나의 장난을 치렀던 정도의 수준으로 담백하게 뽑아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생존자들이 특이한 것 같다. 하디 크루거는 새로운 것 창조해낼 수 잇는 사람이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과거의 전투 조종사인데 리처드 아덴보로는 이 둘을 엄마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또 다른 한 명, 회계사는 신실한 종교심이 있는데 자비심이 없다. 두 명의 건달 같은 노동자들은 돈도 제대로 못 받고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대위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탈영병에 가까운 중사가 살아남는다. 거기에다 조그만 하천 같은 것에도 기뻐하는 그 정도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알드리치식의 미국의 새로운 세계에 진입했다고 본다.
오승욱: 이후의 영화 <더티 더즌(1967)>을 봐도 정상인이 하나도 없다. 미국이라는 가치가 진짜 옳았는지 모르겠지만 원래는 프런티어 정신, 청교도 정신, 남자의 명예 이런 것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인상 깊었던 것이 대위가 죽는 장면이었다. 다른 영화에선 그들의 죽음에 값진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렇지 않고 다리를 절어 쓸데없기 때문에 놔둔 낙타만 있고 그것을 향해 제임스 스튜어트의 총구가 불을 뿜는다. 무덤에 묻어주지도 않고. 어네스트 보그나인도 막노동으로 쓰이지만 쓸모없어지자 버려진다. 왜 버려졌는지 이유도 모르고 버려지고, 이 사회에 대해서 뭔가 기여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고장 나서 버려진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것 아무 것도 없다, 남자로 산 것에 프라이드를 가지는 것이 별 가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남성의 명예, 프라이드, 관계 돈독하기 위해 농담 던지고 받아주고 서로 웃고 떠드는 것은 사막의 일이 벌어지고 나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자기들의 가치를 다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히스테리를 부리는 사람들의 영화는 많지 않다. 몰락해가는 남성의 히스테리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안소니 만도 보여주고는 있지만 남성들을 아예 집단으로 절망하게 만들고 히스테리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정리: 최용혁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