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드 팔마, 희생자의 비명

‘2011 시네바캉스 서울’이 한창인 지난 8월 14일 오후 브라이언 드 팔마의 <드레스드 투 킬> 상영 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현대성’이란 제목의 영화사 강좌 세 번째 시간이 이어졌다. ‘브라이언 드 팔마, 희생자의 비명’을 주제로 열린 이 날 강좌에는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가 나섰다. 그는 드 팔마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과감성과 저열함을 끝까지 끌고 온 감독으로 체질적으로 와닿는 부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드 팔마 영화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현대성에 대한 흥미로운 지점들을 여기에 옮겨 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보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무엇인지를 따라가게 만들고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텔레비전으로 중학생 무렵에 봤었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과 <태양은 외로워>가 그런 작품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보신 <드레스드 투 킬> 같은 류의 영화로, 고등학교때 보았다. 일종의 체질적으로 몸에 와닿았던 영화다. 영화의 리듬 자체가 몸에 딱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개인적으로 아메리칸 뉴 시네마 감독 중에 체질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콜세지 역시 뛰어나지만 체질적으로 몸에 달라붙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작가들보다 드 팔마를 좋아하는 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일종의 B급스러운 저급함 때문인 것 같다. 오늘 이 영화를 보면서는 마지막에 리즈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 했던 말들의 상당수가 드 팔마의 심중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굉장히 더러운데 너는 내게 매력을 느끼냐’는 식의 말이다. 일종의 도발로, 드 팔마가 자신의 영화로 사람들에게 했던 도발과 비슷한 뉘앙스로 느껴졌다. 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감독들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정할지를 두고 고민하게 되는데, 이들은 주로 두 가지 경향을 보였다. 보통의 경우는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추구하는 제작방식을 따라가면서 스스로가 갖고 있던 60년대적인 모던한 경향들을 추가해가며, 일종의 고급화를 해가는 방식을 택한다. 드 팔마의 경우, 똑같이 상업적인 세계로 들어가려 했고 <캐리>나 <퓨리> 이후에 실제로 그런 세계로 진입하기도 했지만,당시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저열하게 평가되던 하위성들을 끌어당기며 나아갔다. 저급함과 하위성을 정치적 함의가 담긴 언더그라운드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팜므 파탈>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과감성과 언더그라운드 성격을 이렇게 까지 끌고 온 사람은 드 팔마가 유일하다는 생각이다.

<드레스드 투 킬>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양산했으며 영화가 개봉했을 때 페미니스트들의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몇 가지 지점들이 있다. 드 팔마로서는 80년대에 들어 나름대로의 전략을 세웠던 첫 번째 작품이다. 전략이라는 건 이 영화가 왜 히치콕의 영화를 가져왔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드 팔마가 히치콕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할리우드 고전영화 세계 안에서 끌어올 가장 적절한 대상을 히치콕으로 설정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히치콕 정도의 작가를 자신의 영화 안에 가져오면 비판이나 비난을 받을 위험이 조금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히치콕을 완전히 패러디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령, 이 영화에서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살인 장면에서 볼 수 있다. 드 팔마 영화에는 언제나 살인이 등장하며 그 장면들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는데, 첫 번째는 특징적인 도구를 사용한 살인이라는 점이다. 총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를테면 <바디 더블>에서는 드릴이, <스카페이스>에서는 전기톱이, <자매들>에서는 식칼이, <드레스드 투 킬>에서는 면도칼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도구성, 어떤 것이 매개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도구들 때문에 살인의 시각적 표상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비교해보자면, 칼의 종류는 다르지만 <싸이코>의 살인 장면에서도 <드레스드 투 킬>과 마찬가지로 칼로 여자를 찔러서 살해한다. 그러나 <싸이코>에서는 실질적으로 몸에 상처를 만들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피부 손상을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6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미국영화에서 신체 손상이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드 팔마의 경우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몸에 대한 손상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살해되는 순간의 시각적 표상성의 변화들을 만들어 간다. 다시 말해 편집이나 미장센의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살인 시퀀스에서 면도날에 의한 손상은 몸의 상처뿐만 아니라 필름의 프로세스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드 팔마 영화의 살인 장면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언제나 살인에 증인이 입회한다는 점이다. 드 팔마의 모든 영화들, 특히 오늘 보신 <드레스드 투 킬>에서 살인과 관련된 모든 장면에는 살인자와 피해자 외의 제 3의 인물이 입회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일종의 꿈 시퀀스는 정신병자 같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엘리베이터 살인 시퀀스에는 리즈가 입회해있고, 기차에서의 살인 시퀀스에도 여러 명의 흑인들이 있다. 이는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다. 살인 장면을 살인자-희생자-관객의 3자 게임으로 구성하지 않는 것이다. 그랬을 경우에 발생하는 감각적인 쾌락을 증인을 경유해 비켜가고 있는데, 여기에는 드 팔마라는 감독에게 영화사적 영감을 준 역사적 건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그가 언제나 스스로 이야기 하는, 드 팔마의 영화를 특징짓게 된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첫 번째는 베트남전이다. 드 팔마는 베트남전 반전 투쟁의 기운이 있었던 시기에 영화를 시작했던 베트남의 자식이다. 실제로 초기 드 팔마 영화는 굉장히 정치적이었으며, 그가 실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작가는 고다르다. 물론 안토니오니나 혹스, 히치콕 등을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드 팔마와 고다르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은 영화사적으로나 시기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암살들, 특히 존 F 케네디의 암살이다. 특히 JFK의 암살이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단순히 사건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사건 자체가 미디어를 경유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JFK의 암살 순간은 소리도 없는 8mm 영상으로 촬영되었다. 나중에 파솔리니 역시 이 제프루더 필름에 대해 이야기한 바이지만, 사람의 죽음의 순간이 필름에 기록되었으며 그것은 심지어 한 테이크인 롱테이크이다. 그러나 그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컷들이 필요하게 된다. 이해하기 위해서 그 장면을 분석해야 하는데, 그 분석의 도구로서 영화적 도구들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은 몽타주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나중에 <블로우 아웃>에서 명백히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드레스드 투 킬>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고 있다.

<드레스드 투 킬>은 결국 드 팔마 자신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피터라는 인물은 드 팔마와 거의 동일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인물을 통해 드 팔마가 이 영화를 만들 즈음의 정신사가 어떠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피터는 일종의 발명가로, 드 팔마 역시 뭔가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창조하려 했던 사람이고, 스스로 명칭을 정할 수 없는 영화들을 만들어 내었다. 극 중에서도 피터가 기계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있자 어머니가 ‘이름은 붙여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데, 그 때 피터는 그 기계에 피터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부분은 드 팔마의 자의식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드레스드 투 킬>은 드 팔마가 연출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전권을 구사한 첫 번째 영화였기 때문에 그의 자의식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피터는 자신의 발명품에 스스로의 이름을 붙여줌으로서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는데, 이를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더블로서 기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드 팔마는 영화에서 언제나 더블을 만들어 낸다. <바디 더블>, <캐리>, <퓨리> 모두가 그 예라고 볼 수 있는데, <드레스드 투 킬>에도 수많은 더블들이 존재한다. 피터와 리즈의 대화 장면에서 피터는 ‘컴퓨터 만드는 것을 중단하고 내 안에서 여자를 한 명 만들어야겠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여자를 창조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드 팔마가 보여주는 더블의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엘리엇과 바비 간의 더블 관계는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빌어 온 것이기 때문에 드 팔마 스스로 창조한 부분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고로 그 둘 간의 더블 관계에 집중해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해석했을 때 <드레스드 투 킬>은 단순한 <싸이코>의 재탕이며 드 팔마는 뛰어나긴 하지만 결국 히치콕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메리칸 시네마의 작가 정도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안이하다. 이 영화에는 그외에도 수많은 더블들이 있으며, 이들을 다 연관 지어 전체적인 영화를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 해보면, 먼저 피터는 드 팔마의 구현체로서 더블을 이루고 있고, 극중에서 자신이 만든 기계와도 더블을 이루고 있다. 이는 영화를 만드는 작가의 무의식과 영화 이미지 간의 더블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드 팔마는 지속적으로 이런 관계를 영화에 등장시키곤 한다. 또한 케이트는 당연히 리즈와 더블을 이루고 있다. 이 점 또한 <싸이코>와 다른데, <싸이코>에서 마리온과 그 여동생이 일종의 짝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여동생의 존재성은 미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케이트에서 리즈로 전이되는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며, 이는 엘리베이터 시퀀스가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살해당하는 케이트가 내미는 손을 잡는 또 다른 손이라는 설정은 리즈가 단순히 하나의 목격자를 넘어서 케이트의 더블로 형성됨을 보여준다. 동시에 리즈 역시 더블을 갖고 있다. 이런 수많은 관계들을 통해 반복되는 장면들이 나타나며, 영화가 전체적으로 순환성을 갖게 되기도 한다. 결국 이 더블이라는 부분들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읽어나가는가, 또 더블의 관계가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된 피터라는 인물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부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또한 <캐리>에서부터 기원한 영화들의 궤적에서 보자면 일종의 홈무비다. 즉, 가족에 관한 영화라는 말이다. 이 영화 바로 직전에 드 팔머는 <홈 무비>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리즈와 피터가 함께 하는 것, 이 둘의 결합은 중요하다. 리즈는 악몽 속에서 깨어나 비명을 지르는데, 그 순간 피터가 달려온다. 앞서 말했지만, 영화의 카메라는 소리를 담아내지 못한다. 거기에는 영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케네디의 죽음의 순간을 담아낸 영상도 마찬가지로 소리는 담겨있지 않다. 비명소리를 담아내는 것, 그것이야 말로 드 팔머가 추구했던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의 마지막 말은 이 영화와도 연결된다. '폐허를 보며 괴물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통의 절규에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희생자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는 한 역사의 끔찍한 사건은 반복될 것이다. 드 팔머는 다음 영화로 <블로우 아웃>을 만들었고, 거기서 녹음기사인 존 트라블타는 희생자의 비명소리를 영상에 넣게 된다. 물론 그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미국의 초상이다.

(정리: 박예하)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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