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멜빌이 여전히 레지스탕스 시절의 가명을 유지했던 것은 그가 또 다른 레지스탕스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다르가 찬사를 보냈던 열렬한 시네필이었지만 영화는 멜빌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즈네 거리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어 저항의 근거지를 삼았던 멜빌은 완고하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브레송, 타티와 더불어 그의 영화 속 인물들(레지스탕스, 경찰, 도박사, 갱스터들)이 과묵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레지스탕스로부터 차용한 행동의 코드를 규율로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은밀함, 완강함, 도덕적 견고함, 희생적인 충성은 그들의 미덕이지만 전후의 프랑스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기도 했다. 멜빌의 인물들은 살아 있지만 절멸된 과거의 흔적을 상속받은 시대착오적인 이들이다. 그들은 상처의 치유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들을 확인하고 행동의 느슨한 절차를 제의적으로 밟아가는 것에 더 흥미를 느낀다. 그들 모두는 하나의 서클로 연결되어 있다. 멜빌의 영화에서 ‘형사-범죄자’ 또는 ‘범죄자-범죄자’들 간에는 기묘한 동질성이 감지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우리는 기차에 오르는 두 명의 인물을 보게 된다. 이들은 거의 비슷한 옷을 입었다. 비슷한 표정에 서로 유사한 제스처를 취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료인가, 친구인가, 형제인가? 이들이 침대칸에 들어서는 순간에야 우리는 둘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장면은 두 남성의 표면적인 우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엮여있음을 보여준다. 이 순간은 알랭 들롱과 지안 마리아 볼롱테가 황량한 벌판에서 서로의 연대를 확인하는 그 유명한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멜빌의 고독도 여기에 있다. ‘왜 고독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에 멜빌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사람간의 거래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만일 두 명의 인간이 있더라도 거기에는 늘 배신이 개입한다. 우정은 신성한 것이지만 멜빌은 사랑보다 배반이 인간행위의 근본적인 원동력으로 작동한다고 여겼다.


이 영화는 “석가모니께서 붉은 분필을 들어 원을 그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이 당장은 모를지라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때가 되면 누구라도 필연적으로 갈라진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모두는 붉은 원으로 맺어질 것이다”라는 라마 크리슈나의 경구로 시작한다. 숙명적인 유대와 비극, 도주의 불가능성이 처음부터 주어진다. 감옥에서 출소한 코레, 후송도중 탈주에 성공한 보젤, 알코올중독자인 왕년의 명사수 장센, 이들 셋은 운명적으로 서로 얽히면서 감옥, 길거리의 레스토랑, 상티의 지하세계의 암흑가 소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영화 마지막의 시골의 외딴 별장에 모이게 된다. 그들의 우주는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닫혀있다. 가령, 장센의 방은 여행용 트렁크들로 가득한데, 그가 밀실공포증을 유발하는 방에서 벗어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피는 궁극적으로는 그가 꾸는 환각만큼이나 환상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라스트는 <그림자 군단>(1969)에서 ‘더 이상 도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라는 마지막 말을 떠올리게 한다.

글/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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