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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작가를 만나다] <창피해><연소, 석방, 폭발, 대적할 이가 없는> 김수현 감독

“결국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11월의 ‘작가를 만나다’ 상영작은 김수현 감독의 <창피해>(2010)와 최근 ‘영화음악∞음악영화’ 프로젝트를 통해 발표한 중편 <연소, 석방, 폭발, 대적할 이가 없는>(이하 <연소>)(2012)이었다. 거의 3시간 동안 두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본 관객들은 김수현 감독과 김상현 배우가 참석한 시네토크에도 자리를 지키며 늦은 시간까지 영화에 대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지연(영화평론가) : 이 두 편의 영화들이 어떤 아이디어나 영감으로부터 출발했는지 궁금하다.

김수현(영화감독) : <창피해>는 건강한 여성의 삶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 시작했다. 이것저것 궁리를 하다가 뭔가 좀 특별한 사랑, 여성들 간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보면 어떨까했는데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연소>는 그동안 한국영화 산업에서 익숙했던 스타일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결과물을 내고 싶었다. 한 명의 캐릭터를 다양한 느낌으로 표현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 상현씨를 꼬셨다(웃음). <연소>는 결과물에 대한 판단을 떠나 스스로 영화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작품이라 개인적으로 의미가 크다.

 

정지연 : 김상현씨는 두 영화에서의 느낌이 다르고 특히 <연소>를 볼 때 굉장히 흥미로웠다. 한국영화 중에 한 명의 배우에 대해 이토록 매혹을 표현하고 그 배우의 다양한 면을 읽어낸 영화가 있었나 싶다. 원래 자신이 갖고 있던 개성들을 영화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부분도 있고 특별히 참조한 부분들도 있을텐데.

김상현(영화배우) : 주어진 상황만 갖고 연기한 부분도 있고 구체적인 대본을 갖고 연기한 부분도 있다. 영화에 쓰지는 않았지만 내 시점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카메라를 내가 들고 촬영하기도 했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을 때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했고, 이때 말한 것들을 감독님이 나중에 대본으로 정리해주었다. 연기할 때는 ‘이게 뭐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알겠더라.

 

 

정지연 : <귀여워>에서 김수현 감독만의 이상한 활력, 기운, 에너지를 좋아했기 때문에 <창피해>를 볼 때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창피해>의 여성 인물들이나 주요 공간인 바다의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침잠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소>에서는 <귀여워>의 활기나 에너지가 다시 느껴진다. 그리고 감독님의 영화는 서사가 선형적이거나 주인공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도 아니다. 플래시백도 많고 캐릭터들도 분산되는 편인데 시나리오를 어떻게 쓰는지, 어떤 아이디어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구체화시키는지 궁금하다.

김수현 : 출발할 때의 기분에 따라 작업할 때의 방식과 과정에 조금씩 차이가 생긴다. <귀여워> 때는 열정이나 패기, 자신감이 강했다. 뭐가 됐든 내 방향으로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제작사의 요구로 어떤 것을 빼거나 넣는 것이 아깝거나 과잉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두 번째 영화 <창피해>의 시나리오를 쓸 때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우려하고 걱정했던 것들을 나도 모르게 의식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뭔가 덜 차있는 것 같고, 피해가는 느낌의 ‘척하는’ 느낌의 영화가 나온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만들면 안 되겠다 싶어서 어떤 컨셉으로 누구와 영화를 찍을지 먼저 결정하고 <연소> 작업을 시작했다. 촬영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보충하고 완성을 했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유익했고, 나를 새로운 출발점에 다시 서게 만들어주었다. 실제 배우와 그 배우의 삶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꼼꼼하고 구체적인 고민을 했다. 아까 김상현씨도 이야기를 했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인터뷰가 굉장히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를 기본으로 장난도 치고 여기저기에 끼워 넣기도 하면서 촬영의 2/3이 지났을 때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다. 즉 게릴라식으로 영화를 촬영하고 제작한 건데,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정지연 : 두 영화에서의 연기 연출이 다른 것 같던데 연기의 컨셉을 어떻게 잡았는지 궁금하다. 특히 <연소>에서의 김상현씨는 영화 속 캐릭터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부분에 대해 감독님과 어떤 대화를 했는지 궁금하다.

김상현 : 감독님의 연기 연출 방식이 크게 변한 건 아니지만 두 편을 같이 하며 감독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창피해> 때는 상황에 대한 분석이 많아서 애를 많이 먹었다. <연소>도 어렵긴 했는데 그건 정말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었다(웃음). 내가 뭘 벗어야 할지, 어떤 옷을 입어야할지를 고르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너무 흥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머리 쥐어짜지도 않으면서 제대로 고민을 했다.

 

정지연 : <창피해>의 이질적인 프레이밍이 특히 눈에 띈다. <창피해>나 <연소>의 촬영과 인물들의 프레이밍 컨셉이 궁금하다.

김수현 : <창피해> 때는 나 스스로 정리를 분명하게 할 수 없다보니 극단적인 앵글들을 썼다. 그래서 전체 기조나 밸런스에 맞지 않는 컷들이 있다. 그런 숏들은 대부분 고민이 부족해서, 또는 뭔가 답답해서 그렇게 찍은 것이다. <연소>는 작은 규모의 촬영이었다. 심지어 나와 김상현씨 둘이서 촬영한 장면도 있을 정도이다. 어떤 미학적인 스타일이나 컨셉을 미리 정하고 촬영에 접근하기 보다는 조건과 상황에 맞게, 그리고 그 순간 느껴지는 연기의 톤을 껴안으며 전체적인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관객1 : <창피해>와 <연소>에서 특별히 여성을 주제로 한 이유가 궁금하다.

김수현 : 내가 여성을 많이 좋아한다(웃음). 남성보다는 여성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존재들인 것 같다. 여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막연한 기대와 추측 속에서 계속 탐구하고 다가서고 싶고, 그 안에서 뭔가를 찾고 싶은 바람들이 작품에 드러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아직 거창하게 얘기할 자신은 없다. 여성이 계속 등장하는 건, 정말 사소하지만 내가 여성을 좋아하기 때문이다(웃음).

 

정지연: 감독님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한국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복잡한 내면을 갖고 있고 다층적인 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창피해>의 경우는 과거의 상처들을 안고 있기도 하다.

김수현: 내가 경험했던 여성들의 장점과 좋아하는 점들을 한 캐릭터 안에 모으다보니 그런 캐릭터가 나왔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뽑아내고 싶었지만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힘들었다. 오늘 영화들을 다시 보며 <창피해>나 <연소>가 관계나 소통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결국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연: 김상현씨는 배우이자 관객으로서 김수현 감독의 여성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하다.

김상현: 시나리오로 볼 때보다 스크린으로 볼 때 오히려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캐릭터들이다. 글로 봤을 때 캐릭터가 보인다는 것은 기존 캐릭터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다는 것인데 감독님의 시나리오에는 그런 것들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 정해져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통해 보려고 하면 오히려 스스로에게 갇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연기 뿐 아니라 다른 무엇을 하든 어떤 언어에 고착화된 시선을 가지면 열린 마음으로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점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 이번에 얻은 가장 큰 성취다.

 

관객2: <연소>에서 스튜디오 장면의 연기가 그 전의 상황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김상현: 스튜디오 장면의 경우 감독님이 몇 가지 다른 상황에 대한 대본들을 줬고 앵글도 각각 다르게 촬영했다. 그 다음 굉장히 응축된 편집을 했다. 영화에 나온 건 구체적인 상황인 동시에 수많은 상황을 압축시킨 것이기도 하다. 나도 성우로 일하면서 그런 상황을 수없이 많이 겪었는데 다큐멘터리도 아닌 영화에서 어떤 진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신기했다.

김수현: 다른 장면들과 달리 스튜디오 장면은 밀도나 긴장감이 있었고, 연기하는 태도나 분위기를 잡을 때도 달랐다. 그런 것들을 배우에게 처음부터 요구한건 아니었는데 일상화된 영화연기의 방식으로 굉장히 집중하며 연기를 했다. 본인 스스로도 이 장면은 다른 장면과 연기 패턴이 달라야한다고 판단했던 것이 아닐까.

 

정지연: 양쪽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그 장면은 어떤 아이디어로 연출했고, 배우로서 그런 연기는 어떻게 이끌어내는 건지 궁금하다.

김수현: 순간적인 아이디어였다. 간단하지만 캐릭터에게는 치명적인 자해를 하는 설정을 떠올렸다. 정해진 것이 없었는데 리허설도 없이 배우가 눈빛과 호흡 하나로 뚝딱 만들어냈다. 찍으면서도 깜짝 놀랐다.

김상현: 평소 작업을 할 때도 스스로 의지할 수 있는 자기 이미지를 많이 만드는데 거울 장면을 찍을 때도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집중했다. 그것들로부터 오는 출혈을 견뎌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거울 장면의 움직임이 가장 어렵고 긴장한 연기였다.

 

관객3: 두 영화의 시작과 끝이 비슷한 느낌이 있는데 특별한 의도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특유의 에너지나 활력의 균형을 어떻게 잡는지 궁금하다.

김수현: 영화를 시작하고 닫는 방식은 전체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를 어떻게 시작하고 끝낼지를 고민하며 결정한다. 인물을 제일 정확하고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우들이 갖고 있는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은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 아니다. 내가 놀이터를 마련해주면 배우들이 이미 갖고 있던 자신들의 끼를 알아서 끌어낸다.

 

정리 : 장지혜(관객에디터) | 사진 : 박지연(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