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7. 15:26ㆍ작가를 만나다
"생명의 이야기를 위해 죽음을 이야기해야 했다"
올 해의 마지막 ‘작가를 만나다’에선 민병훈 감독의 <터치>(2012)가 상영되었다. 상영 전에는 영화의 주연을 맡은 유준상 배우의 깜짝 방문으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상영 후 이어진 대화 시간엔 영화엔 인간의 아름다움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감독의 믿음과 좋은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응원과 지지가 함께 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디에서 출발하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민병훈(영화감독):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로, 어머니와 삼촌의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구성해서 만들었다. 두 분의 이야기를 토대로 생명과 죽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영화에는 오락을 떠나 생명을 살리는 것, 인간을 숭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명의 이야기를 하려면 죽음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이 영화는 존엄사의 문제도 슬쩍 건드리고 있고, 욕심을 내어 많은 주제를 던지면서 용기 있게 몰아쳤던 것 같다. 우리 사회의 암울한 부분을 직면함으로써 그 안에서 질문이 던져지고, 오히려 희망과 생명의 존엄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성욱: 생명의 이야기를 죽음 안에서 살펴보게 되는 건 가장 크게는 종교적인 부분이 있다고 본다. 이 영화에 나타나는 몇 가지 상징들이 갖는 종교적인 뉘앙스가 있다. 이를테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반복해서 등장하는 사슴의 이미지, 성당에서 시작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죽음과 죽음 이후에 관한 이야기와 질문 같은 것들이 있다. 이 영화 자체가 종교를 다루는 이야기라기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시리즈처럼 현대의 일상적인 영역 안에서의 그런 질문들을 뽑아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이미지들은 어떻게 떠올리셨는지 궁금하다.
민병훈: 사실 처음엔 사슴이 아니라 양을 생각했었다. 근데 양이 나오면 사람들이 웃을 것 같더라.(관객 웃음) 우리가 ‘사슴 같은 눈동자’라고 표현할 때 그 눈동자가 신의 시선이라고 봤다. 신이 우리 인간을 바라볼 때 측은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의 엔딩에서 사슴의 눈망울을 잡으려고 노력을 했다. 그 눈망울이, 스스로 신을 내던짐으로써 인간이 재탄생하는,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통해서 꼭 하고 싶었던 얘기는 아픈 사람을 도와줘야 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터치’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노동자들을 자살로 내모는 사회라면 어떻게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의 김지영 씨가 용기를 내어서 한 여인을 터치해주고, 그 여인의 아름답게 죽을 수 있는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켜준다는 것, 그래서 죽음과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터치’라는 말로 풀어내고 싶었다.
김성욱: 영화 안에 여러 양상의 접촉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안에서의 접촉의 느낌이 있는가 하면, 카메라가 인물을 찍는 방식, A 와 B의 에피소드가 같이 연결되어지는 방식과 같이 시간과 공간이 밀착되어 영화 전체도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병훈: 이 영화가 밀도 있는 영화이기를 원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면 적막감이 끝까지 흐르면서 긴장을 늦출 수 없이 몰입하는 영화이기를 원했다. 김지영 씨가 첫 날 왔을 때 환자를 업고 들어오는 장면부터 촬영했는데, 여배우에게 처음부터 가장 난이도 있는 장면을 시키니 힘들어했다. 그 때 지영 씨에게 했던 얘기는 만약 이 선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 영화의 진실성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배우들, 스텝들을 휘몰아서 한 번에 가야했고, 격정적인 느낌으로 하고 싶었다. 다행이도 이 작품은 준비한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어떻게 찍어야 하고 어떤 속도감과 느낌이어야할 지,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야하는지에 대한 계획이 분명히 있었다.
김성욱: 침례를 하듯이 환자를 데리고 물에 들어가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런 공간과 행위가 영화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순간으로 생각되었을 것 같다.
민병훈: 그 장면에 대해 가톨릭 교구 측에서 많이 문제 삼기도 했다. 아픈 여인은 폐결핵 환자로 설정되어 있는데 만약 환자를 방치하게 되면 영화에서처럼 각혈을 하고 나중에는 몸이 아래부터 썩어 들어가게 된다. 실제로는 이런 환자를 절대 물에 담글 수 없으며, 우리나라의 종교 시설에서는 안락사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 장면은 어떤 상징적 표현이다. 침례의 의미도 있고, 무엇보다 이 여인이 고맙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권리, 누군가가 도움을 줘서 새 생명을 얻는 그런 느낌들의 상징적 표현으로 담았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꼭 담고 싶었던 장면이었고, 관객들이 그 장면에서 눈시울을 적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만큼 정말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김성욱: 영화의 마지막에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혹시 엔딩으로 염두에 둔 다른 장면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민병훈: 엔딩 장면은 시나리오 그대로였다. 남편이 무릎을 꿇고 아내를 바라볼 때 영화 안에서 가장 진실한 얼굴로 바라보는 표정이기를 원했다. 아내도 마치 하느님의 시선과 같은 측은지심의 시선으로 남편을 바라본다. 지영 씨에게 울면서 미소 짓는 그런 표정을 원했는데, 카메라가 돌고 오래 걸리지 않아 원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 엔딩만큼은 시나리오대로 꼭 찍고 싶었다. 촬영 전에는 두려웠다. 하지만 다행히 배우들과 주변 여건이 잘 모아져서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관객1: 김지영 씨 연기가 인상 깊었다. 특히 김지영 씨의 극 중 의상의 의미와 피해자 학생의 아버지를 만날 때의 장면에서 인물에 맞춰졌다가 배경에 맞춰졌다가 하는 포커스 변화는 어떤 의미인가.
민병훈: 그런 장면들이 우리 영화의 터치라고 생각했다. 그 것이 극 중 김지영 씨의 심정이기를 원했다. 시선 너머에 있는 부분들을 담아내고 싶었다. 의상에 대해선, 지영 씨의 캐릭터가 간병인이고 가난한 엄마이지만 이 여인의 욕망이 있을 거라 봤다. 스스로 드러내고자 하는 갈망을 붉은 옷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관객2: 유준상, 김지영 두 배우의 캐스팅은 어떻게 하시게 됐는지 궁금하다.
민병훈: 먼저 준상 씨와는 오랜 친구다. 친구와 작품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다행인 건 서로 신뢰를 가지고 작품을 했고, 이 작품으로 우정이 더 돈독해졌다. 지영 씨는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동생이었다. 여태까지 만난 배우 중에 가장 진실하고 보석 같은 배우다. 이 아름다움이 영화 속에서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신을 다해 본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해주었고, 좋은 배우와 작업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관객3: 영화에서 촉각적인 것 못지않게 땀이나 술 같은 후각적이거나 미각적인 부분도 요소들도 나온다. 촉각적인 부분은 주로 사건적인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런 이미지 자체가 세기 때문에 영화가 의도하는 부분과 조금 엇갈리는 점이 있는 것 같다.
민병훈: 시나리오를 쓸 때, 첫 장면으로 나오는 성당 장면을 맨 처음 썼다. 성당에서의 대화 장면처럼 앞뒤가 없이 긴장감 있게 시작되기를 원했다. 사람의 감정을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데, 그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만드는 건 미장센과 카메라 워킹이다. 땀, 냄새 이런 것들이 더 폭발적으로 나왔어야 했는데 쫓겨서 촬영하는 부분이 많다보니 그런 부분들이 좀 더 생생하고 풍부하게 나오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관객4: 피해자 학생의 부모가 아무 조건 없이 합의하면서 용서해주는 의미가 궁금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픈 여자의 아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사라지는데 그 아이는 왜 사라졌고 어디로 간 것인지 궁금하다.
민병훈: 삭제된 장면에서 그 아이는 먼저 기차에서 내려 선로를 따라 걸어간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서자 아이 앞으로 하얀 눈송이가 하나가 떨어지고 아이의 눈물이 흐른다. 멜랑콜리해서 이 장면은 영화에서 뺐다. 아무 말 않던 아이는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강아지 인형을 돌려주는데 말이 아니라 그런 행동에서 연상될 수 있기를 원했다. 이 아이가 이렇게 퇴장하는 것이 쓸쓸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가 보듬어야할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용서는 쿨 하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용서란 그렇게 툭 던져져야지 그 용서를 받은 이 사람도 아무 조건 없이 다른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관객5: 영화가 개봉하고 바로 교차상영 되어서 보기가 힘들었다. 감독님이 직접 상영을 내리셨을 땐 ‘왜 감독이 관객의 볼 권리를 뺐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사회가 전혀 인식하지 못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영화 정말 잘 봤고 감독님의 결정도 잘하신 일이라 생각된다.
민병훈: <터치>로 얻은 것이 많다. 타협하지 않는 영화, 저 스스로 관객이 되어 눈물 흘리고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길 원한다. 스스로 떳떳하게, 굴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 무엇보다 저와 같은 위치의 감독님들과 영화를 지망하시는 분들께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든다면 그 영화를 지지해주는 분들이 있을 테니 힘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한국영화가 더 건강해졌으면 한다. 더 힘을 내서 좋은 작품 만들도록 하겠다.
정리: 장지혜(관객 에디터) | 사진: 박지연(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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