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클럽] 존 포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지난 9월 19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영화에 대한 강좌와 함께 관객들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인 ‘시네클럽’ 행사로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상영했다. 존 포드의 작품 세계와 웨스턴 장르의 창조, 변형, 발전을 주도한 그가 남긴 발자취를 살펴보는 소중한 기회가 된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이번 시네클럽 상영작으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선택하게 된 건 추석을 맞이해서 고향이나 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는 영화이고 잘 설명되어 있는 편이지만 내부적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볼 만한 지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수색자>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 두 편의 영화는 굉장히 비슷하면서도 반복과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 있다. 또한 그 차이에는 수많은 변경들이 있다. 그런 점들을 간략하게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이 영화는 서부극으로 불리기엔 꽤나 심심한 영화이다. 일단 존 포드의 웨스턴 중에서 이렇게 말이 많은 영화는 드물다. 또한, 웨스턴의 주 무대인 공간들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존 포드의 웨스턴에서 등장하는 서부의 로케이션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실내극이라 불릴법하다. 그리고 남성적인 공간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된 공간은 부엌이다. 도박장이나 보안관 사무실, 바, 목장 같은 남성적 공간이 아닌 부엌이나 신문사 사무실이나 교실과 같은 공간들이 주로 등장하고, 이것은 웨스턴 영화에서는 보통 여성적 공간들이다. 바가 나오긴 하지만 그곳도 액션이 벌어지는 공간이 아닌 수다스러운 공간, 정치적 집회장이다. 유일하게 마을 변두리에 위치한 톰의 집만이 로케이션 촬영 된 예외적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존 포드의 웨스턴으로서는 액션이 적고 말이 많은 영화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영화의 후반부쯤에서 존 웨인이 술에 취해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다. 집도 법도 없는 방랑자적 인물인 리버티 밸런스와는 달리 톰은 이미 집이 있고, 또 새로운 집을 지으려고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집을 불태워 버리는 장면의 느낌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되었다. 왜 자신의 집을 불태워버리는가. 가장 단순한 이유는, 그 집은 자기가 살 집이 아니라 여자를 위한 집이었기 때문이다. 할리라는 여자가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아닌 랜섬에게로 떠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집이 필요 없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가 살 집 뿐만 아니라 자기 집까지 태워버리게 된다. 그 이후에 톰은 아무 곳에도 거주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집을 불태운다는 것은 <수색자>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보다 훨씬 격렬한 감정의 상태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생기는 가장 큰 의문은 톰이 왜 집을 불태워버리는가 하는 지점이다. 그런 관점 안에서 이 영화를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기차의 도착과 랜섬은 거의 등치되어 표현된다. 동시에 그것은 문명의 도착이기도 한데, 그것이 조금 애매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를테면, 랜섬이 밤에 낡은 역마차를 타고 처음 서부에 도착할 때는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서부의 법과 충돌하게 되는 순간이다. 자기가 들고 온, 문자로 쓰여진 법전이 총과 채찍과 폭력으로 의해 진행되는 서부의 법과 혹독하게 충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법전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간다. 리버티 밸런스는 영화 내내 문자에 대한 심각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그의 행동의 상당수는 총질보다도 문자를 찢어버리는 일이다. 처음에는 법전을 찢어버리고, 다음에는 신문, 그리고 끝내는 신본 스타라는 신문사에 들어가서 모든 윤전기나, 조판기를 뒤집어엎고 신문으로 피바디의 얼굴을 덮어버리기까지 한다. 그것은 통설적으로 보자면 문명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굉장히 물질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영화의 첫 부분에 랜섬에게 혹독한 서부의 법을 가르쳐 주겠다며 그가 벌이는 행위는 법전, 문자, 질서, 체계에 대한 공격이다.

흥미로운 것은, 랜섬이 쓰러져있을 때 그를 마을로 데려온 것이 톰이었다는 사실이다. 랜섬을 황야에 쓰러지게 한 인물이 리버티 밸런스라면, 방치된 그를 마을로 데려온 것이 톰이라는 점에서 톰과 리버티 밸런스 사이에 미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동시에 톰이 랜섬을 마을로 데려오는 과정 안에서 스스로 자기파괴적인 상태로 빠져들게 되는 운명적 상황들이 있다. 톰이 랜섬을 맨 처음에 데려간 곳은 부엌이라는 공간이다. 그곳은 여자들이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초반부 장면에서 특히 할리는 그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하고 있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에이프런을 한 남자가 나오는 것은 이 영화가 유일할 것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도 볼 수 있듯 존 포드의 영화에서는 에이프런이란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모성적 소품이다. 제임스 스튜어트 자체가 웨스턴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기도 한데, 그가 에이프런을 두른 인물이라는 점이 이 영화에서 특별하게 위치하고 있다. 랜섬은 부엌이라는 여성적인 공간에서 친숙하게 에이프런을 두르고, 접시를 닦고, 웨이터 일을 하면서 지극히 여성화된 인물로 나타난다. 존 포드의 웨스턴에서 보면 서부사나이의 여성화라고 볼 수 있다. 랜섬은 철저하게 여성화된 인물로 표현되어있고, 그것은 또한 문명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기차의 도착, 문명화, 법과 관련된 부분들이 모두 여성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과 반대 위치에 있는 것이 무법적인 것, 혹은 바나 술집과 연결된 남성적 공간들이다. 그 두 가지가 충돌적인 방식으로 영화 안에서 표현되고 있다.

사실 이 영화의 설정은 일종의 삼각구도다. 할리라는 여자를 제외해놓고 보면, 랜섬과 톰과 리버티 밸런스라는 삼자의 관계가 이 마을 안에서 어떻게 벌어지는가가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다. 톰과 랜섬 간에는 빛과 어둠 같은, 일종의 그림자적인 관계의 느낌이 굉장히 강하다. 그러나 유사성의 측면에서는 톰과 리버티 밸런스가 맺고 있는 관계가 더욱 강하다. 앞서 말했듯 조형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톰이 랜섬을 집에 데려가서 총질로 모욕을 주는 행위는 나중에 랜섬과 리버티가 벌이는 총격의 순간과도 굉장히 비슷하다. 랜섬이 진행하는 교육을 중단시키는 것 역시 리버티 밸런스와 톰이다. 결국 톰이라는 인물은 랜섬이 시도하고 있는 서부의 문명화와 남성의 여성화에 대해서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런 부분은 리버티 밸런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사실상 리버티 밸런스가 서부에서 사라질 때 동시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톰이라는 인물이다.


이 영화의 톰과 <수색자>의 이단이라는 인물 간에는 유사관계가 있지만, 차이점 역시 갖고 있다. 그나마 수색자에서 이단이라는 인물은 마을에는 들어올 수 없지만 황야로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톰은 황야로 떠날 수도 없고 집으로 돌아올 수도 없는,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서 완전히 추방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리버티 밸런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리버티 밸런스도 계약관계 안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런 관계에조차 소속되지 않은 황야의 인물로 설정된 것이 톰이고,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마을의 변두리에 집을 짓고 할리를 맞아들여 아이를 낳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할리를 데려올 수 없는 상태가 됨으로써 그는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인물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집을 불태운다는 것은 마을의 외곽에서 서부의 사나이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며,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톰이 집을 불태우는 것과 리버티 밸런스를 죽이는 것은 거의 비슷한 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둠 속에서 톰이 리버티 밸런스를 쏘는 것은 일종의 자해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리버티 밸런스만 없다면 영화에 후반에 그려지는 것과 같이 랜섬이 언설과 정치적 절차를 통해 충분히 대표자가 되어 법과 질서를 지켜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리버티 밸런스라는 인물이 존재했기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톰의 존립 근거는 리버티 밸런스라는 인물이다. 그래서 리버티 밸런스를 죽인다는 것은 톰이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톰은 첫 번째로 자기 집을 불태우고, 두 번째로 리버티 밸런스를 죽이고, 세 번째로 랜섬에게 리버티 밸런스를 죽인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세 가지의 과정을 거치며 완벽하게 자기파괴적 국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수색자>보다도 훨씬 더 비극적인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존 포드의 웨스턴은 여러 가지 형태의 국가 공동체의 건립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전체적으로 보면 법과 문명화와 교육을 통해 미국적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서부적 남성성이 철저하게 여성화 되는 것이다. 톰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적 공동체의 건립을 위해 총을 들었던 인물들이 결과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톰이 영화의 후반에 드러내는 느낌은 <그랜 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느낌과 굉장히 비슷하다. 거기서 이스트우드는 총을 다시 들지만 쏘지는 않고 죽게 된다. 물론 이 영화에서 톰이 리버티 밸런스와 격돌해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리버티를 죽임으로서 사실상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사회에서 총과 폭력은 국가 성립의 기초가 되었지만, 국가가 성립된 이후에는 총을 들었던 사람들을 지워버리지 않고서는 미국적 공동체가 진행될 수 없다는 맥락이다. 똑같은 관점에서 그것은 <미스틱 리버>와도 굉장히 비슷하다. 미국이라는 공동체가 성립되는 과정 안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내재적 폭력성이 있고, 그것은 결코 사라질 수 없으나 감춰지고 덮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렇게 덮어져야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 톰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편집장 피바디가 영화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집회가 열리는 바에서 술을 팔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피바디는 ‘자유가 없다’고 이야기 한다. 바에서 술을 마실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인 문제, 또 그것과 연결된 자유의 문제나 법과 질서 간에 이상한 충돌성을 보이고 있다. 리버티 밸런스와 피바디와 톰은 이 마을에서 가장 법과 질서를 무시하며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러나 톰은 동시에 제약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옛날의 방식대로 할리를 데려올 수도 없고, 이 마을을 끌어갈 수도 없다. 피바디라는 인물 역시 자유를 위해 글을 쓰고 활동하기는 하지만 제약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리버티 밸런스 역시 망나니처럼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제약되어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공동체나 국가가 건립되는 과정, 그리고 법과 질서가 집행되는 과정은 개방되어있던 부분이 폐쇄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굉장히 역설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리버티 밸런스의 이름 안에 리버티라는 단어가 들어있고 그를 죽인다는 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법과 질서가 정립되며 자유를 죽인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 종합적인 측면들이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든다. 법과 질서, 충돌과 폭력 같은 문제들을 다룬 정치적인 우화 같기도 하다. 그런 정치적인 상황들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지켜볼 수 있는 하나의 흥미로운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고향에 대한 이야기 혹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집을 잃어버린 사람과 자신의 집을 불태워버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공동체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리버티 밸런스라는 악당조차도 자족적일 수 없다. 무뢰한들의 세계가 끝난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면 대단히 비극적이기도 하다. 무뢰한들의 세계가 사라지고, 동시에 영웅들의 세계마저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존 포드의 시선은 우울하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수색자>와 이 영화를 항상 함께 생각하게 되는데, 두 편의 영화에서 오는 슬픔이 약간 다른 것 같다. (정리: 박예하)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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