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클럽] 개봉 50주년 기념 장 뤽 고다르 <네 멋대로 해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영화를 선정해 상영하고, 상영 후 영화에 대한 강좌와 함께 관객들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대화를 나누는 ‘시네클럽’ 행사를 하고 있다. 지난 6월 20일에는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발표된 지 50주년을 기념하여 누벨바그의 혁명을 일으킨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특별 상영하고 고다르의 작품 세계와 그가 일으킨 누벨바그 혁명을 추억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상영 후에는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의 강연도 이어졌다. 극장이 거의 만석일 정도로 큰 호응을 얻은 시네클럽 행사는 고다르의 저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반증했다. 그 특별했던 시간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올해는 <네 멋대로 해라>의 개봉 50주년이 되는 해다. 이 영화를 80년대에 극장이 아닌 문화원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 90년대에 들어서는 비디오를 통해 접했다. 90년대 비디오떼끄에서 고다르영화들 불법 복제본을 형편없는 자막번역으로 보면서 무슨 말인지 궁금했는데, 그때 막연하게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여전히 고다르의 영화는 미스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다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화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하는 게 어떤 의미있는 일인가를 덜 생각했을 것 같다. 그 덕분에 영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 <네 멋대로 해라>를 상영한건 개봉 50주년 기념, 그리고 그가 만든 '프랑스 영화의 역사 100년'이란 작품에서 말하듯이 이 영화의 의미를 기념하는, 다시 말해 잊고 지낸 걸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기념하는 게 <네 멋대로 해라>의 시작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계급보다 세대적 문제를 더 중요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영화의 개봉 시기에 누벨바그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다르란 작가가 등장한 세대적 문제라는 것이다. 영화적 문화유산을 소비하는 것으로 그는 관객, 시네필이 되었다. 1950년부터 1960년까지 고다르는 영화 만들 궁리를 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장편을 만들 권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아 절치부심했었다. <네 멋대로 해라>는 1959년 8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4주 만에 당시 영화제작비 절반 밖에 안 되는 돈으로 제작했다. 영화를 보면 초두부분에 미셀이 '나는 해야만 해'라며 조급하게 무언가를 향해 가는 것, 정확하게 모르는 성급, 조급의 느낌이 고다르 자신의 절박함과 같지 않나싶다. 1959년이란 시점을 보면, 당시 까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 모두가 영화를 만들고 있었고, 샤브롤은 3번째, 트뤼포는 1959년에 <400번의 구타>로 칸에서 수상하며 난리가 났었다. 고다르의 주변 친구들이 영화를 만들고 그 이후 고다르가 가장 늦게 영화작업에 참여했는데, 고다르는 20대 중반에 들어서 자신이 작가로 데뷔하는 나이를 손꼽아 계산했다고 한다. 웰즈가 26세 이전에 첫 장편을 찍고 에이젠슈타인도 그러했는데, 26세 이전에 찍어야만 한다는 고다르의 강박관념이 상당했다고 한다. 결국 고다르는 다른 누벨바그리언들과 달리 제작사를 끼고 영화를 찍고, 시나리오도 당시 이미 주가를 올리던 트뤼포가 폐기처분한 걸(웃음) 가져다가 만들기로 결심했다. 고다르가 영화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도합 10년으로, 그는 글을 쓰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을 동등하게 생각했다.

고다르가 관객, 비평가의 입장에서 영화를 시작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1950년대 말의 조건으로 보자면 이탈리아는 네오리얼리즘시기를 겪고 난 후였고 이후 프랑스의 뒤늦은 격동은 이전 세대가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제도와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후 세대가 새롭게 영화를 만들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시기였다. 영화를 본다는 것, 그리고 비평을 한다는 것은 누벨바그리언들이 전 세대를 공격하는 수단이었다. 고다르는 나중에 <영화사>라는 작품에서 ‘애매한 물결’이라는 표현으로 누벨바그리언들이야기를 담아냈다. 시작이라 생각했는데 끝물이었던, 애매한 새로움, 뭔가 혁명을 꿈꿀 수 없는, 물려받은 관객세대에서 시작해서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려고 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고다르는 자신에게 부여받지 못한 권리를 획득하려 작업을 했던 사람이다. 전 세대의 영화들을 탈취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는 엄청난 영화들을 봤고 그 영화들 안에서 미래에 대한 비평작업을 했었다. 영화를 탈환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고다르라는 작가가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들었을 때 그가 느낀 세대적 고민은 이전 세대들이 가진 영화를 자기 손으로 획득해나가는 것, 레지스탕스의 필요성이었다. 그가 당시 미국범죄영화, 특히 강탈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획득하는 게 없다고 느낄 때 뭔가를 도둑질하고 싶은 생각. 에티카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제대로 된 자리에 갖다 놓기 위해 훔치는 것. 이것은 극장에 갇혀서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10여년을 살아온 시네필 사이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었고, 비단 그것만이 아니라 박물관, 시네마테크 같은 곳에서 영화들을 발견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영화 속 미셀이라는 인물은 끊임없이 도둑질을 자행한다. 자동차, 특히 미제자동차를 훔치고 미국산 여배우를 등장시키는 것, 중간 중간에 미국산 소설가들의 생각들을 인용하는 것은 고다르와 아메리카니즘의 문제였다. 그는 이것들을 철저하게 훔쳤다는 것을 명백하게 표출하고 등장시켰다.

뒤늦다는 조건, 행위 안에서 고다르의 영화 만들기는 당시 불가능한 조건에서 영화를 꿈꾸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모노그램 픽쳐스 바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걸 눈여겨 보아야 한다. 고다르는 예술영화를 만든게 아니라 새로운 B급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는 도제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 고다르는 ‘나의 영화학교는 극장’이라는 말을 즐겨했다. 영화를 배우는 것을 도제시스템을 거치지 않고도, 글을 쓰는 것만으로 이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고다르는 자신이 이전 세대의 영화를 탈환하기 위한 시기를 기다리며 영화의 본질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는 장소로 시네마테크와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실을 생각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새것을 창조한다는 것만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재활용을 잘 하는가의 기술이라 생각된다. 훔쳐오는 건 기존 존재의 물건을 가져오는, 달리 말하자면 재활용의 기술인 것이다. 소비를 생산적으로 미덕화 하는 것. 영화를 많이 봤던 고다르는 과거의 영화들이 폐기처분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꼴라주, 브리꼴라주, 남들이 썼다가 버리게 되는 것들을 모아서 재활용해서 만드는 것이다. 고다르는 그런 식의 영화들, 제대로 카메라에 담겨지지 않았던 현실들,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거리, 공간들을 담고 재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일종의 영화넝마주의 같은 것이다(웃음).


고다르는 스스로 이 영화에 출현한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거리를 걷는 밀고자가 바로 고다르다. 밀고자는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고 그대로 고발하는 사람이다. 고다르가 제기하는 건 모럴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었다. 밀고자는 왜 밀고를 하고 연인들은 왜 배반을 하는가, 파트리샤가 계속 미셀에게 제기하는 건 이런 물음들이다. 왜, 무슨 의미인가라는 것. 하지만 고다르의 대답은 단순하다. 동어반복이지만 밀고자는 밀고를 한다. 연인들은 사랑을 나눈다. 고다르가 밀고자인 동시에 감독인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평가되기 이전에 눈으로 본걸 그대로 소상하게 전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되어 그는 당시 기법들, 테크닉 등 모든 것들을 위반하면서 새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 <네 멋대로 해라>를 지금 기념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이 영화는 ‘영화’라는 것이 존재한 상황들에 대한 면밀한 인식과 그 자체가 제대로 ‘영화’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을 탈환하는 기획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저항적 행위를 했었고 그런 시도를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새로움을 꿈꾸려는 세대들은 불가능의 조건 안에서 타인의 손에 소유된 자신들의 것이라 믿는 영화를 탈환했다. 영화를 탈환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들을 담아낼 권리를 획득하는 것과 같다. 시각에서의 정당함을 찾는 것, 윤리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 판단 이전에 존재하는 사물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찍으면서 하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뤼미에르, 멜리에스로부터 출발되는 것이었다. 수많은 테크닉과 재활용을 재단되고 판단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 것, 그게 진정한 시작점이 아닐까. 영화를 가져오는 것, 내 것으로 가져온다는 말의 진정성이라는 건 영화를 삶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네 멋대로 해라>는 여전히 가치 있고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정리: 강민영)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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