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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클럽

에릭 로메르를 말한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영화를 선정해 상영하고, 상영 후 영화에 대한 강좌와 함께 관객들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인 ‘시네클럽’ 행사를 하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모든 영화인들의 안타까움 속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의 유작 <로맨스>를 상영하고, ‘에릭 로메르를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열띤 강연을 펼쳤다. 로메르의 유작을 통해 그의 작품이 남긴 의미와 가치를 관객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소중한 자리였다. 그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로메르가 타계한 다음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에릭 로메르의 밤'이라는 회고전을 했어요. 저희도 로메르 회고전을 열고 싶었는데, 한국에 수입된 영화가 <여름 이야기>하고 방금 보신 <로맨스>라는 영화하고 두 편밖에 없어서 회고전 개최가 쉽지 않은 사정이죠. 로메르 회고전은 아트선재 시절에 개관 프로그램으로 했던 적이 있었고, 국제 영화제 때문에 로장주 필름에서 배급담당을 하시던 분이 한국에 오시면서 또 한 번 연 적이 있었어요.

 

로메르는 대단한 절약의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박을 터트린 적은 없지만 적은 비용으로 만들어서 손해를 결코 보지 않는 방식의 작가예요. 촬영 당시에도 절대 두 번 이상 촬영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로메르는 ‘영화는 거절의 예술’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a라는 선택을 하느냐 b라는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에서 a를 선택했을 때 b를 버리게 되는 것을 말하는 거죠. a를 선택했을 때 b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으니까 여벌로 찍는 장면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거절의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영화는 끊임없는 반복과 변주로 이루어져 있어요. 모든 영화를 통틀어 연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연애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작가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하나의 스타일을 일관되게 자신의 전 작품에 담아냈어요. 모든 예술가들은 자신의 일관된 주제와 테마를 반복해서 보여주지만 매 작품마다 변주를 해서 보여 주는데 로메르도 이런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로메르 영화에 대해서 거의 언급이 안 되는 것 중 정말로 중요한 것은 공간에 관한 문제 같아요. 로메르는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 아니고 공간의 예술’이라고 말한 적도 있죠. 70년대에 로메르가 찍은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건축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요. 그건 공간과 장소에 대한 관심의 결과물인데, <내 친구의 남자친구>, <녹색광선>, <비행사의 아내> 같은 작품은 실제로 70년대 다큐를 찍었던 곳에서 촬영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일산 신도시처럼 공간 자체가 한정되어 있고 사람들이 밀집되어져 있으면 그곳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거죠. 우연히 만나고 우연성을 빙자해서 만나기도 하는 사건들이 전개가 되는 곳, 그런 공간성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일종의 거대한 아쿠아리움 같은 공간인거죠.

 

로메르는 우연성과 즉흥성을 즐겼던 감독이에요.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가 터무니없는 우연성을 내포하고 있죠. 예를 들어, <파리의 랑데부>은 우연을 가장한 부조리한 놀이들을 벌이는 영화입니다. 우연히 만나고 우연히 내가 거기에 있고 하는 식의, 즉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놀이나 게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것들이 로메르 영화를 특징짓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로메르의 영화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독특한 부분이 있죠. <로맨스>에 그런 게 집대성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데요, 몸과 영혼과 관련된 부분이 전체적인 테마, 자연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문제, 남녀의 사랑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 한 사람의 몸이 사라진 이후에 그 사람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 불멸성 등. 이런 것들이 영화 전체에 있는 테마예요. 그리고 이것들의 최종적 국면으로서 은총적 세계는 로메르가 평생을 걸쳐서 자기 영화를 통해서 담아냈던 부분이죠.

 

아이러니하게도 로메르의 명성이나 위상에 비해서 그의 영화가 가진 풍부함이 많이 담론화되어 있지 않아요. 인터뷰나 서적 등도 별로 없고요.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지만 풍부하게 언급되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정말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돌아가신 이후이긴 하지만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까지 확실히 다 모아놓고 전부 다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좀 더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다양한 지점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이후에도 또 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최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