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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클럽

조셉 로지의 정치학

[시네클럽] 조셉 로지 <무슈 클라인>

지난 3월 20일 열린 시네클럽 행사에서는 조셉 로지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무슈 클라인>을 상영하고, 상영 후에는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조셉 로지의 정치학’이란 제목으로 펼쳐진 이날 강연은 <무슈 클라인>이 갖는 의미와 무엇보다 조셉 로지가 자신의 영화에서 보여준 정치적인 태도에 대해 알아보고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에 루키노 비스콘티 전을 개최하면서 <저주받은 자들>의 정치적 맥락 안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 아직 진행되지 못했지만 2년 전 쯤부터 조셉 로지 특별전을 생각하고 있는데, 로지의 영화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인 <무슈 클라인>을 한 번 쯤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 이 시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6, 70년대에 파시즘이나 2차 대전 당시의 시기를 다루었던 영화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 영화도 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앙리 루소는 「비시 신드롬」이라는 책에서 이 영화가 나왔던 70년대 초를 ‘깨어진 거울의 시대’라고 묘사한다. 이때는 회상과 의문을 제기하는, 홀린 듯한 이끌림의 시대이자 회고 풍조를 통해 프랑스의 40년대의 문제들이 유령처럼 되돌아오는 시대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되돌아왔던 문제들은 크게 보면 세 가지로, 반유대주의, 대독협력, 레지스탕스의 신화가 그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몇 편의 영화들이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선구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 레네의 경우 일찍이 이런 작업들을 하고 있었지만 60년대 말에는 마르셀 오퓔스의 <차와 동정>이라는 작품이 있고, 70년대 초에는 멜빌의 <그림자 군단>도 등장했으며 특히 이 시기에 루이 말이 만든 <라콩브뤼시앵>은 굉장히 큰 여파를 불러 일으켰다. 앙리 루소는 이런 영화들이 등장한 것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가 촉매가 되어 그런 역사적 시기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70년대 초에 프랑스에서 이런 일종의 회고주의가 등장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 시기에 경제적인 위기가 불어 닥침에 따라 미래가 불확실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래의 시간을 생각하기 보다는 과거의 노스탤지어나 복고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또 중동에서의 위기와 관련하여 반유대주의나 유대적인 기억이 불거지게 된 면도 있다. 동시에 2차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만들어진 레지스탕스의 신화가 샤를 드골이 몰락하면서 그 신화에 대한 의문들과 질문들이 동시에 발생하게 되기도 했다. 74년부터 78년까지 제작된 영화 중에 독일의 점령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만 45편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그 이전 10년 동안 만들어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였다. 이런 영화들은 몇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가장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발형 영화들이다. 그 시대에 있었던 끔찍한 문제들을 다루는 것인데 이건 가장 일차적인 부분인 것 같다. 잊고 있었다든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금 더 노스탤지어적인 영화들이다. 분노를 보여주기보다는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복고적인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이 단어가 완벽하게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탐미적인 영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이다. 루이 말의 <라콩브뤼시앵>이 이에 해당되며 방금 보신 영화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은 앙리 루소가 기회주의적 영화라고 표현하고 있는 성인물 같은 것들이다. 나치 점령기의 부분들을 포르노그라픽한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 안에서 나온 영화가 방금 보신 <무슈 클라인>이다. 또한 이 영화는 70년대적인 보편성을 획득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 70년대에는 굉장히 패러노이드적인 영화, 컨스피러시 필름 등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미국에서 이는 정치적인 느와르 같은 양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특히 시드니 루멧의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도 그런 특성들을 약간 갖고 있다. 미스터리한 사건을 추적해 들어갔다가 결국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유형의 영화중에 선구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고, 동시에 굉장히 잘 직조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일종의 덫에 걸린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인 로베르 클라인이 자신과 이름이 같은 또 다른 로베르 클라인을 찾아가는 추적의 과정 사이에 잠깐씩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상황의 변화들이 인서트처럼 많이 들어가 있다. 별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던 이런 부분들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클라인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그를 호송해가기 위한 준비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주 잘 직조된 태피스트리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크레딧 시퀀스에 등장하는 태피스트리를 통해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셉 로지는 종종 영국인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위스콘신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다. 17세 때부터 이미 연극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나중에 극영화로 데뷔하게 된다. 로지는 오손 웰즈와 굉장히 친했고 특히나 그가 만들었던 <심판>이라는 작품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심판>에 등장했던 배우들이 여럿 등장하고 있으며, 몇몇의 공간적 배경 역시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로지는 공산주의자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었다. 미셸 시망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헐리우드의 사람들은 늘 배우의 스캔들에만 관심을 갖고 잡담만 나누었는데 공산당에 입당하면 어떤 문화적 소양을 더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입당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이데올로기적 요인은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공산당에 입당했던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의 활동이 더 이상 어렵겠다는 판단 하에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로지는 크게 보면 네 가지 정도의 시기를 겪게 된다. 초기 헐리우드 시기가 있고, 영국에서도 두 가지 정도로 시기가 나누어지며 작품의 경향이 조금 달라지고, 마지막으로 프랑스로 건너가서 보내는 시기가 있다. 그때마다 그는 이름을 바꾸어가며 영화를 만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아이덴티티의 문제가 로지에게 굉장히 중요하게 작동했을 것 같다.

<무슈 클라인>에서 역시 아이덴티티의 문제가 굉장히 큰 맥락을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로베르 클라인이 다른 로베르 클라인을 추적한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도플갱어적인 스토리다. 이런 부분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는 것은 거울이나 여러 가지 공간적인 매치들이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거울들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장치들이다. 클라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변화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거나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배경들이 특정한 사건을 몰아가는 양상을 취하고 있다. 특히 크레딧 시퀀스 다음으로 이어지는 시퀀스가 이 영화 전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며 보는 사람을 굉장히 날카롭게 후벼 파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여자의 클로즈업으로 시작되는데, 입술을 뒤집어 치아 상태를 보고, 자를 대어 얼굴의 크기를 재며 이 사람이 유대인인지 여부를 의사가 획인하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가 빠지면 이 여자가 벌거벗은 상태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장면은 클라인을 추적하는 스토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사실상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 먼제 이 장면은 당시 유대인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굉장히 비인간적이고 냉담한 방식으로, 섹슈얼한 부분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가운데 사람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다음 시퀀스에서 이어지는, 한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장면의 활력성과 비교된다. 동시에 클라인은 나중에 앞선 그 여자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첫 번째는 클라인이 유대인에게 넘겨받은 그림을 흥정하는 장면이다. 클라인은 앞서 의사가 했던 것과 똑같이 그림의 치수를 잰다. 또한 그가 잔느 모로를 만났을 때, 그녀는 클라인의 얼굴 크기에 대해 말하며 그가 가진 동물적인 지점을 이야기한다. 이렇듯 그가 클라인을 찾아가는 개인적인 여정, 즉 자신의 자아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42년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 안에서 유대인을 다루었던 프랑스 사회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화의 곳곳에 그런 느낌을 주는 부분들이 있다. 가장 극단적인 것은 그가 유대인을 조롱하는 내용의 공연을 보는 장면이다.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클라인의 여자친구만이 유일하게 역겹다는 반응을 보이며 나가자고 말한다. 그런데 그녀가 여기를 떠나자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은 무대에서 ‘유대인들은 떠나야 한다’는 대사가 등장하는 순간과 교묘하게 겹쳐진다. 이는 클라인이 처하게 될 운명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결국 반유대주의적인 정서들이고, 이는 2차 대전 종전 이후에 프랑스 사회가 끊임없이 덮어버리려고 했던 문제다. 실제로 대독협력이나 반유대주의라는 문제들을 대치하는 것으로서 레지스탕스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이 영화의 상당히 많은 장면들은 인물들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공연을 보는 관객들의 얼굴을 굉장히 과도한 시간동안 차례로 훑어나가는 것, 그리고 근방의 레스토랑에서 클라인을 찾는 급사를 따라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이 그러하다. 이런 장면들은, 의도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대독협력을 하거나 반유대주의 정서에 몰입해있었던 당시의 프랑스 사람들을 고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결국 이 영화는 도플갱어적인 또 다른 존재성의 호기심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와, 42년에 프랑스인들의 무관심에 의해서 발생하는 사건을 연결해서 표현한 작품이다. 특히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차이를 넘어서서 그 둘이 갖고 있는 수렴점이라는 지점에서 유대인 문제를 바라보는 영화로, 선구적인 작품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진행이나 카메라 움직임, 미장센 같은 부분들 역시 잘 연결되어 있어서 작품으로서도 굉장히 훌륭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특정한 역사적인 문제와 그것을 다루는 시각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은 작품이 아닌가 한다. (정리: 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