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클럽] 데니스 호퍼 추모 <이지 라이더> 특별상영
지난 8월 7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데니스 호퍼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이지 라이더> 특별상영이 열렸다. 상영 후에는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역사와 현재성에 대한 강연이 이어졌다. 데니스 호퍼의 작품세계와 그의 작업을 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된 시네클럽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올해 데니스 호퍼가 세상을 떠나 그의 작품을 몇 편 묶어서 상영해보려 했는데 당장 수급이 쉽지 않았던 와중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무래도 <이지 라이더>가 아닌가 해서 이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라스트 부분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 장면의 파괴적 이미지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동시대적으로는 1967년에 만들어졌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마지막 장면 또한 그렇다. <이지 라이더>와 같은 해에 나왔던 <와일드 번치>의 라스트 역시 상기된다. 이 두 영화의 라스트는 굉장히 느린 속도로 주인공들의 죽음을 그리며, 움직임이 정지된 순간의 느낌을 잡아낸다. 반면 <이지 라이더>의 엔딩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자브리스키 포인트>의 라스트와 더 비슷한 느낌도 있다. 이 영화의 라스트는 폭발과 거대한 파열, 파국으로 끝나게 되며 거기에 잇따라 갑작스러운 수직상승이 발생하게 된다. 카메라의 갑작스러운 충격적 이미지가 영화의 라스트를 장식하게 되면서 일종의 파국적 죽음의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보면 파국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장면 직전에 피터 폰다가 매음굴의 내부를 걸어 다니다 ‘사망은 인간의 평판을 종결하고 그의 선악을 결정한다’는 글귀를 읽는 순간 오토바이가 파괴되는 엔딩의 장면이 플리커처럼 깜빡거리며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는 여러 번 그런 식의 플리커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런 순간엔 언제나 바로 뒤에, 혹은 조금 뒤에 벌어질 순간의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이것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편집에서의 일관된 구조적 형식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스스로를 할리우드의 박해받는 예수라 칭하며 다녔던 데니스 호퍼는 술과 마약에 찌들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태에서 편집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적처럼 편집본이 완성되어서 공개되긴 했지만 사실은 완성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점에서 비추어 볼 때 이 편집 상태가 섬세한 구조적 형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잠깐잠깐 보여주는 장면들은 시간의 혼잡성을 발생시키며 일종의 기시감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영화 전체를 흐르는 시간도 일관되게 나열되어 있지는 않다. 이를테면 영화의 라스트 부분에 나오는 묘지장면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영화를 먼저 구상했던 사람은 피터 폰다였는데, 처음 이 영화를 떠올린 날 새벽녘에 데니스 호퍼에게 연락해서, “네가 연출하고, 나도 함께 출연해서 같이 영화를 만들자. 40~50만불 정도의 제작비를 끌어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그렇게 영화가 출발하게 되고, 첫 계약 후 착수금으로 4만불 정도의 돈을 받아서 가장 먼저 찍었던 것이 영화 바로 그 묘지에서 LSD에 취해있는 장면이었다. 그건 영화가 실질적으로 출발하기 전 단계에서 일시적으로 먼저 찍었던 장면이고 최종본에 들어갈지 말지도 나중에 판단하였다고 한다. 결국 영화가 전체적으로 공간의 이동에 따라 촬영된데 반해 묘지장면은 미리 촬영되었기 때문에 시간의 느낌도 조금 다르게 편성되어 있다. 또, 그런 면에서 파국을 예정해두고 여정을 완성해가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고로 죽음의 예견이란 단순한 편집효과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정된 수순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런가하면 라스트 바로 직전의 모닥불 장면에서 등장하는 피터 폰다의 우리는 실패했다, 는 발언자체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서두에서 이미 파국을 선언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피터 보그다노비치나 데니스 호퍼 등 이 세대의 인물들이 최종적으로는 연출적 실패를 해나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성공의 선두에 있었던 사람들이 실패해나갈 것을 이미 직관적으로 예견하고 있었던 예언자적 영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예언자적 성격뿐만 아니라 일종의 도피를 끝낸다는 느낌도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여기에 등장하는 히피나 두 명의 주인공, 잭 니콜슨 모두 각기 도피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니콜슨을 포함한 이들의 무리가 시골의 바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뜨는 장면은 그들이 현실 안에서 그들이 직접적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의도했든 아니든, ‘실패했다’는 발언에는 예언적 성격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도피주의의 시대를 끝맺는 의미를 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LSD나 환각으로 도망갈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해야만 하는 시대이다. 개인적으로, 자기가 태어났던 시대의 기운을 갖고 싶은 것일 수도 있는데,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영화들에 관심이 굉장히 많다. 그때는 어떤 새로운 희망이 등장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찌하여 60년대의 폭발이 단지 폭발로만 끝나버리고 그 이후로 이어지지 못했나하는 부분에 대한 관심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20대들로부터 무언가 새로운 것들이 생겨날 수 있지도 않을까 한다. 바꿔 말하면 세대적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60년대 영화들을 많이 소개하고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관된 맥락은 아니지만 그 무렵의 영화적 기운들을 지금 다시 끌어들여서 세대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를 두고 이야기 할 때는 계급적, 산업적 관점만이 아니라 세대적 관점이 대단히 중요하게 등장하게 된다. <이지 라이더>는 별 볼일 없는, 그러나 동시에 욕망과 열정이 들끓었던 그 세대가 만들어낸 집단적 합작품이라고 칭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개인의 작가에서 집단의 작가로 넘어가는 작업을 본의 아니게 만들어냈던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이 경우엔 일찌감치 와해되어 버렸지만 그런 작업이 하나의 운동체처럼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존 카사베츠처럼 아예 수공업적으로 영화를 만들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시스템 안에서 자기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일종의 ‘커머셜 오뙤르’가 될 것인가. <이지 라이더>는 그런 고민의 분기점에 있었던 작품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여전히 이야기 될 만한 가치가 있다. (정리: 박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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