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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서울아트시네마 개관 10주년 기념 존 카사베츠 회고전

[리뷰]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이트'

영화와 삶을 동시에 긍정하다

-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이트> 

 

 

 

 

머틀 고든(지나 롤랜즈)은 브로드웨이의 인기 많은 여배우다. 평소대로 공연을 마치고 호텔로 귀가하던 밤, 머틀은 자신의 열성 팬이 눈앞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어버리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도 연극 이야기만 해대는 동료들의 모습에서 그녀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부터 머틀은 자신의 연기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그녀가 연기해야 할 ‘버지니아’라는 인물은 한 번 이혼했다가 재혼한 경력이 있는, 연극의 제목 그대로 <두 번째 여인>이다. 하지만 머틀은 결혼을 한 적도 없고, 중년의 버지니아를 연기하기엔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료 배우 모리스(존 카사베츠), 연출자 매니(벤 가자라), 극작가 사라(조안 블론델) 모두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머틀의 고민은 타인의 삶을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극 속 허구의 인물인 버지니아의 삶은 머틀 자신의 삶이 아니다. 하지만 연극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사라의 말대로라면 ‘버지니아(타인)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극중 타인의 삶을 존중한다면 대사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선 안 된다. 그 대사는 버지니아의 삶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라는 머틀에게 말한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감정을 실어서 대사를 정확하게 치는 거예요. 그러면… 버지니아가 나오게 되는 거죠.”

 

 

하지만 머틀에게 이런 식의 연기는 리얼리티와 인간다움이 부재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리얼’한 무언가를 연극에서 보여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매니는 머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연극 무대에 정말로 ‘리얼’한 것이 들어오면, 그걸 지켜보는 관객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매니가 생각하기에 ‘리얼한’ 연극은 곧 실패나 다름없는 것이다.

 

 

<오프닝 나이트>가 내포하고 있는 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내 것이 아닌 타인의 삶을 또 다른 타인(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이것은 영화 속의 인물 머틀과 영화감독 존 카사베츠가 가진 공통의 문제의식이다. 결국 <오프닝 나이트>는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려는 시도인 것이다. 카사베츠의 9번째 영화는 영화가 삶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자기반영적인 성찰이 드러나는 영화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라온다, 왜 영화가 아니라 하필 연극인가? 심지어 <오프닝 나이트>에서 삶과 예술을 고민하는 프로타고니스트는 연출가가 아니라 배우다. 연극과 영화. 보통의 경우 양자의 관계는 연기 양식의 차이나 시공간의 연속성 등으로 논의되곤 한다. 그러나 <미치광이 같은 사랑>(1969)에서 연극을 끌어와 영화의 속성에 대해 질문했던 자크 리베트의 경우, 둘의 문제는 그보다 더 복잡하면서 근본적이다. 호주의 영화학자 조지 쿠바로스(George Kouvaros)에 의하면, 자크 리베트는 영화가 연극에 초점을 맞추면 자기 반영의 일부로서 일정 정도의 거리두기를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 그 자신만의 작용을 시험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리베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연극에 대한 주제를 택했다면 그것은 곧 영화의 진실성을 다루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사랑했던 많은 영화들이 연극에 대한 첫 영화였던 건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은 다른 모든 것들―베리만, 르누아르, 쿠커, 가렐, 루슈, 콕토, 고다르, 미조구치 등― 역시 연극에 관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진실과 거짓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거짓인, 진실에 대한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에 이 질문 외의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리베트에게 영화(거짓)는 삶(진실)을 담아내는 것인데, 이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건 연극이다. 이는 카사베츠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오프닝 나이트>에서 연극이 올라가는 무대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허구의 인물이 배우를 완전히 덮어버리는 연극은 보통의 연극이며,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연극이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머틀은 무대 위에서 혼란을 느낀다. 그녀가 무대 위에서 자신의 삶과 허구의 삶 사이에서 어지러움을 느낄 때마다 카메라는 무대 위로 올라가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 업 내지는 클로즈 쇼트로 찍는다. 이는 현실의 삶이 픽션을 뒤흔들 때, 그 혼란스러움의 순간을 포착해내려는 움직임이다. 한편 영화 후반부에 길게 등장하는 유쾌한 즉흥극은 버지니아와 마티(연극), 머틀과 모리스(현실)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연극과 현실이 어지럽게 교차되는 지점이다. 이 때 카메라는 망원 렌즈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완전한 허구가 아닌 상태, 삶의 리얼리티와 연극이 공존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굳이 가까이 다가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상태로 가만히 관람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오프닝 나이트>의 주인공이 배우여야만 하는 이유는 명징하다. 카사베츠에게는 무대 위에서 현존하는 배우가 무대 뒤의 연출자보다 더 중요한 존재다. 배우는 자신의 몸으로 현실과 픽션을 중재한다.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완전한 결과물로서 완성된 영화보다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삶이 영화 속으로 침투하는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 때 카메라는 그 현상을 기록하는 최소한의 기계-장치적 역할만을 수행하게 된다.

 

 

<두 번째 여인> 연극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머틀과 매니의 부인은 서로를 포옹한다. 영화의 끝을 장식하는 건 머틀과 갈등을 겪었던 매니나 모리스와의 화합이 아니다. 내러티브의 진행과는 상관없어 보였던 매니의 부인이 영화가 끝날 때 불쑥 등장하는 것은 다소 엉뚱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프닝 나이트>의 이러한 엔딩이야말로 비로소 영화와 삶이 나란히 존재하는 순간이다. 가만히 연극을 지켜보던 관객이 픽션과 삶의 혼란스러운 공존에 긍정하고,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등장하여 영화 너머의 현실이 영화 속으로 균열을 내며 침투한다. 이전까지가 연극과 삶의 교차됨이었다면, <오프닝 나이트>의 엔딩은 그러한 크로스 상태가 영화로 넘어오는 순간인 것이다. 카사베츠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지 화면으로 길게 보여준다. 영화와 삶이 비로소 나란히 놓일 때, 관객은 영화와 삶을 동시에 긍정하게 된다. 두 시간이 넘는 기나긴 영화가 끝나갈 때쯤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엔딩은 마치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송은경: 관객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