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사랑에 관한 영화

- 존 카사베츠의 <사랑의 행로>

 

 

 

 

정신과 의사가 극중 사라(지나 롤랜드)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가져본 적 없는 것에 상실감을 느끼죠?” 그때 사라가 답한다. “사랑은 강물 같은 거예요. 사랑은 계속되는 것이고, 결코 멈추지 않아요.” 영화의 제목 <사랑의 행로Love streams>의 출발점이 되는 이 장면은 사라가 남편과의 이혼 협의 후 정신과 의사에게 찾아간 후다. 그녀에게는 남편 사이에 딸이 하나 있고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 이력이 있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 후에 딸을 데리고 먼 곳으로 데려가려고 한다. 늙고 병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딸은 그녀와의 생활을 거부하고 남편과 살기를 선택한다. 그녀는 여전히 남편과 딸을 사랑하고 가족을 원하지만 결국 혼자 남겨진다.

 

극중 로버트(존 카사베츠)는 소설가다. 그는 부인도 자식도 없이 큰 집에서 아름다운 여자들과 함께 산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함께 음악을 듣는다. 가벼운 여흥과 여자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늘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그의 전부인과 그가 존재조차 알지 못한 어린 아들이 등장한다. 전부인은 그에게 아들 알비를 며칠만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함께 살던 여자들에게 수표를 써 주고 아주 다정하게 그녀들을 집에서 내보낸다. 그는 서먹한 아들과 단 둘이 집에 남겨진다.

 

1984년작 <사랑의 행로>는 존 카사베츠가 연출한 총 13편의 장편 영화 중 마지막 작품이다. 그의 연출작 리스트에 올라 있는 1985년의 <빅 트러블Big Trouble>은 원래의 감독이 중도에 그만두게 되어 카사베츠가 떠맡게 된 작품으로, 생전에 그는 <빅 트러블>을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사랑의 행로>그의 실질적인 유작인 셈이다. 영화는 두 명의 인물을 축으로 삼는다. 실제로는 부부이면서 극중에서는 남매로 등장하는 지나 롤랜드와 존 카사베츠가 그 두 사람이다. 영화의 전반에는 그들 각자의 삶을 조명한다. 가족의 사랑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사라와 가벼운 여흥 같은 관계만을 원하는 로버트의 삶은 언뜻 보기에는 상반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짐을 잔뜩 가지고 돌아온 사라가 로버트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그들의 삶은 접점을 이룬다. 그러나 그들 각자의 삶은 섞이지 않고 유리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저서 『사랑의 정신분석Au Commencement E'tait L'amour』에서 말한다. ‘나에게 더듬거리며 불평을 털어놓는 사람들은 현재나 과거에서의 사랑의 결핍, 현실적이거나 상상적인 사랑의 결핍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나를 이 무한의 상황 속에, 고통이나 황홀 속에 놓지 않고서는 이 불평을 들을 수가 없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태에서야 타자는 자기의 모험의 의미를 구성한다.' 그녀는 우울증, 무력감, 히스테릭 상태와 같은 병적 징후는 결핍에서 찾아온다고 보았다. 존 카사베츠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러한 히스테릭 상태를 잘 보여준다. 주로 여성 주인공에게서 두드러진 히스테릭 상태를 발견할 수 있으며 특히 1974년작 <영향 아래 있는 여자A Woman Under The Influence>, 1977년작 <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녀들은 모두 어떤 종류의 사랑에 대해 결핍과 상실감을 느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사랑의 결핍과 병적 징후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점이다.

 

존 카사베츠는 영화에서 실제 현실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우연한 사건에는 흥미가 없었고,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려고 했다. 말들은 존재하지만 대화의 결론을 이끌어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돈되지 않고 단정치 못한 것들이 진짜 삶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히스테릭 상태와 병적 징후들을 보이지만 극단적인 결말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속에 녹아들어 있어서 그것들은 파도처럼 높게 일었다가 다시 잠잠해지며 그런 순간들은 매번 반복된다. 가령 <오프닝 나이트>의 주인공 머틀에게는 새로운 연극에서 새로운 배역을 맡아 소화해야 할 때마다 가볍게 혹은 심각하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1968년작 <얼굴들Faces>에서 나타나는 가정의 관계 또한 불협화음의 격렬한 순간과 조용한 평온이 번갈아 반복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기대되는 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의 행로>에서는 사라를 통해 히스테리의 병적 징후가 고착된 상태를 가장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 그녀의 상태는 발전적으로 심화되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부터 그녀는 이미 깨어 있음에도 꿈을 꾸는 경험을 한다. 첫 번째 환상에서 그녀는 자동차로 남편과 딸을 치어 죽인다. 두 번째 꿈은 그녀가 로버트의 집에서 쓰러질 때 일어난다. 꿈속에서 그녀는 남편과 딸이 살고 있는 집의 수영장에서 그들과 함께 있다. 그녀는 그들을 웃기려고 시도하지만 그들은 절대 웃지 않는다. 그녀는 게임에 졌다고 말하며 수영장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꾸는데 그때 그녀는 남편과 딸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꿈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현실이 꿈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꿈을 반영하게 되는 경우는 사라처럼 전도된 생각과 막연한 믿음을 가질 때, 그래서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에 일어난다.

 

사라는 타인과의 어떤 깊은 관계도 원하지 않는 로버트를 본다. 그녀에게 그것은 삶의 방기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애완동물을 사주기로 마음먹고 농장을 방문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 가지 동물을 선택하지 못하고 농장의 거의 모든 동물들을 사서 로버트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조랑말 두 마리와 염소, 병아리, 앵무새, 짐이라는 이름의 개를 잔뜩 이끌고 택시에서 내리는 장면은 그녀가 거대한 짐을 가지고 유럽의 공항에서 헤매던 장면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그녀 삶의 어느 한 부분도 누락시킬 수 없다. 누락이란선별이며, 중요하지 않은 것을 버린다는 것이고,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사라가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돌아가자. 이 장면에서는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실제 상담을 받는 환자는 사라인데 그녀는 의사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녀는 편안함을 느끼도록 기울어진 의자가 아니라 허리를 꼿꼿이 세워야 하는 의자에서 책상에 팔을 걸치고 앉아 있다. 반면 정신과 의사는 환자용 의자에 등을 기대어 누워 책상에 발을 올리고 담배를 피운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이 있어야 할 위치가 바뀐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녀가 사랑은 계속되는 것이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때에 정신과 의사는 단호히 대답한다. “그렇지 않아요. 사랑은 멈추는 겁니다.”

 

짐 자무쉬는 <존 카사베츠에게 보내는 편지Open Letter To John Cassavetes>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의 영화는 사랑에 관한 것이고, 믿음과 불신, 고독, 기쁨, 슬픔, 황홀, 어리석음에 관한 것입니다. 또한 쉼 없는 것, 취한 상태, 회복하는 힘, 욕망, 유머, 완고함, 그리고 오해와 두려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손소담 /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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