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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프랑스 영화의 황금기:1930-1960

[리뷰] 앙리 조르주 클루조 '오르페브르의 부두 Quai des Orfevres'

<오르페브르의 부두>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반(反)프랑스적이라는 이유로 논쟁에 휩싸여 상영금지 당했던 <까마귀>(1943) 이후 영화를 찍지 못하다가 4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는 조르주 심농과 함께 벨기에를 대표하는 미스터리 작가 S.A.스티만(Stanislas-André Steeman)의 <정당방위 Légitime défense>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각색의 과정이 독특하다.
클루조는 활동을 중단했던 4년 동안 새로운 스타일로 무장한 스티만의 소설을 각색하기를 즐겼는데 (이미 그 전에도 <21번가의 살인자 L'assassin habite... au 21>(1942)와 같은 스티만 원작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정당방위>를 영화를 만들어 싶어 시나리오 작업을 하려다가 절판된 사실을 알고는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장 페리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소설책을 어렵게 구해 읽어본 뒤 시나리오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원작과 비교해 살인범의 정체가 달라졌고 레즈비언 사진가 도라 모니어의 캐릭터 또한 변화를 겪은 것이다. 하여 최종적으로 확정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제니(수지 들레어)는 스타가 되고 싶어 안달 난 뮤직홀 소속의 가수다. 노래도 잘 부르고 외모도 뛰어난 탓에 접근하는 남자가 많지만 피아노 연주자 모리스(버나드 브리어)를 남편으로 두고 있는 유부녀다. 그녀에게 호색한이지만 돈 많은 노인이 접근해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유혹하고 제니는 이에 응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자 남편 모리스의 질투심은 극에 달하고 욱하는 심정에 노인의 저택을 급습하게 된다. 하지만 노인이 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모리스는 놀란 가슴을 쥐어 잡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이 후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만 한다. 형사 안토니(루이스 주베)가 사건을 조사하면서 모든 정황이 모리스의 범죄로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영화잡지 <포지티브>는 1995년 영화 비평가들을 대상으로 프랑스 영화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서 <오르페브르의 부두>를 가장 뛰어난 스릴러 영화 2위에 올려놓았다. <공포의 보수>(1953) <디아볼리끄>(1955) 위주로 클루조의 작품을 생각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다소 의외의 결과처럼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인간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촘촘한 미스터리 그물망을 만들어내는 연출력은 이 영화에서도 역시나 발군이다. 클루조 영화의 모든 사건이 항상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오르페브르의 부두>도 남녀 관계의 의심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파멸 직전까지 내몰리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의 특징이라면 관객에게 사건 추리의 핵심이 되는 모든 패들을 공개하지만 극 중 인물들은 상대방의 생각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오르페브르의 부두>는 제니와 모리스, 모리스와 형사 안토니의 사이를 비롯해 극 중 인물 서로가 의심을 공(ball) 삼은 핑퐁게임을 벌이는 데 여기서 중요한 건 피의자의 입장에서 범죄를 숨기고, 형사의 입장에서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승부의 면모가 아니라 의심의 관계 속에 오고가는 진짜 감정의 정체에 있다.
이 부분이 <오르페브르의 부두>의 핵심이랄 수 있을 텐데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은 놀랍게도 비극의 형태로 영화를 마무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니와 모리스가 피의자의 혐의를 벗고, 또한 서로에 대한 의심을 거두면서 사랑을 재확인하는, 클루조의 영화치고는 드물게 해피엔딩을 이루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스릴러물로 분류되지만 이를 감싸고 있는 더 큰 구조는 멜로에 가깝다. 뮤직홀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의 분위기 역시도 어두움 일색이라기보다는 극 중간중간 노래와 춤이 삽입되면서 스릴러를 완충하는 무대극 위주의 아기자기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포지티브>는 <오르페브르의 부두>를 2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평했다. ‘감정의 극단을 오가면서도 은근하게 드러내는 솜씨가 극작가처럼 발군이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가장 뛰어난 연출력이 발휘된 작품이라 할만하다.’

글/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