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종말의 풍경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작은 그러하다. 껴안은 남녀 위로 흘러내리는 재. 반짝이는 재 아래로 애처로운 남녀의 몸은 이내 말라비틀어진 끝에 훅 불면 사라질 듯하다. 그들의 육체는 죽음을 기억한다. 이미 벌어진 죽음의 기억 위에 그들은 현재를 산다. <4:44 지구 최후의 날>의 도입부도 그러하다. 시스코와 스카이는 서로의 육체를 더듬다 곧 뒤엉킨다. 그들의 육체는 싱싱하다. 여자의 팽팽한 육체에 비해 남자의 그것은 시들었으나, 죽음의 기운이 두 사람의 육체에 스며들기 전이다. 그들에게도 죽음은 예고되어 있다. 4시간 44분 후 세계가 종말을 고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에게 죽음은 기억된 무엇이 아니라 기억되어야 할 무엇이다. 미래에 기억될 무엇. 그런데 누가 그들의 죽음을 기억한단 말인가.


종말이 벌어진 후에 시스코와 스카이의 육체는 어떻게 될까. <히로시마 내 사랑>의 그들 혹은 우리처럼 부패의 과정을 밟을까. <4:44 지구 최후의 날>이 만들어진 21세기는 디지털의 시대다. 영화는 대략 26개의 클립을 가져와 종말의 날을 기리고, 사람들은 화상 통화를 통해 육체의 접촉 없이 사랑하는 자를 불러내며, 삶의 스승들은 아이패드에 기거하며 지혜의 말씀을 전한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는 폐허도 없고 썩을 육체도 없고 아울러 어떤 기억도 없(을 것이). 시간이 마지막을 고하는 찰나, 세상은 디지털의 개별 조각처럼 완벽하게 사라질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가 순백의 화면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건 그래서다. 아무것도 없는 제로의 상태. <4:44 지구 최후의 날>은 종말을 다룬 어떤 SF영화보다 무서운 작품이다.


<4:44 지구 최후의 날>은 같은 해 나온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숲에 동떨어져 사는 <멜랑콜리아>의 인물들은 점점 발작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초월의 순간과 대면한다. 마침내 <멜랑콜리아>는 거대한 종말의 이미지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4:44 지구 최후의 날>의 인물은 뉴욕의 한 귀퉁이에 사는 보헤미안이다. 섹스하고 그림을 그리고 가족과 통화하는 것이 그들이 하는 행동의 거의 전부다. 거리의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바에서 노래하거나 친구들과 놀거나 거리를 거닌다. 어떤 이는 자살을 택하지만, 난데없이 찾아온 종말에 그들은 대개 평소 살던 방식으로 대응한다. <4:44 지구 최후의 날>은 종말이 찾아온 시간조차 문득 다가온 낯설고 기괴한 방문자 정도로 처리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9.11의 재현처럼 보인다.


“누가 종말을 초래했는가?”는 “누가 우리의 세상을 파괴했는가?”와 같은 의미로 통한다. ‘포스트 9.11’의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가속화했고, 종말을 다룬 대개의 영화는 공격하는 자들과 전쟁을 벌인다. <4:44 지구 최후의 날>은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 모든 것을 망쳤을 때, 마지막 순간까지 타자를 공격하고 원망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라고 묻는다. 대신, 보다 원초적인 질문들, 그리고 명상. 종말은 세상이 창조되면서부터 예고되었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걸까. 과연 인간은 존재해 마땅한 선한 존재일까. <4:44 지구 최후의 날>이 구한 진실은, 페라라가 예전 작품에서 추구한 주제와 사뭇 다르다.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졌음에도 <4:44 지구 최후의 날>은 가장 거대한 순간에 가장 거대한 진실과 마주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펑키하던 페라라의 세계는 바야흐로 소울풀한 지점으로 옮아가는 중이다. 인물에 내재한 악의 종착점에 집착하다 유한한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영역을 확장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페라라를 말할 때 더 이상 마틴 스콜세지를 떠올릴 필요는 없겠다.


글/ 이용철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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