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스 카락스의 신작 <홀리 모터스>(2012)의 프롤로그는 영화관의 관객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인데, 정지된 스틸사진에 어둠에 잠겨 있는 모습이 생생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거의 죽어 있는 모습들이다. 말 그대로 그들은 익명의 군중들이다. 반면 직접 프롤로그에 출연한 카락스 감독은 마치 몽상가처럼 여전히 꿈을 꾸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밀실 같은 방의 비밀스런 벽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데, 이 미로는 곧바로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으로 통한다. 거기서 관객들은 죽은 사람들처럼 아무런 동요 없이 묵묵히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지난해 비평적인 열광이 있긴 했지만 사실, 13년 만의 신작은 아마도 이런 관객의 무감각으로 기다려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그의 영화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관객들이 아직 있을지에 대한 질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의문이 예술가의 깊은 고뇌로 표현되고 있는 듯했다.


신작 <홀리 모터스>를 홍보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던 레오스 카락스 감독을 만났다. 영화의 프롤로그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되돌아온 답변은 간단했다. “나는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관객은 내게 그저 죽어갈 무리들입니다.” 예의 관객들은 그저 한 무리의 군중일 뿐이다. 반면 역설적으로 한 명의 드니 라방은 십여 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복수성의 삶을 살고 있다. 카락스의 이런 답변에서 대중을 향한 어떤 분노를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차라리 자기 자신의 삶에 머물러 있는 것의 괴로움과 거기서 벗어나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내는 변화라는 상반된 감정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일찍이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혹은 영화가 질적으로 다른 삶의 실현과 약속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어떻게 부정 당하는지 말했었다. 풍부한 삶을 위해 영화를 보러 가자는 슬로건을 믿고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을 영화는 자꾸 구경꾼으로 전락시킨다. 삶도 영화도 단순한 스펙터클에 지나지 않고, 주체적으로 임할 길 없는 관객으로서의 삶을 양산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내 영화에서 관객들과 어떤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다. 대중을 배려하며 소통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자유를 완전히 빼앗긴 관객들은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배려 받을 가치조차 없다.


3월에는 국내에서 개봉됐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던 영화들, 그리고 전혀 국내에 소개될 기회가 없었던 영화들을 상영하는 ‘동시대 영화 특별전’을 준비했다. 기이한 일은, 공교롭게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최근 신작들이 모두 서울아트시네마를 통해서만 상영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더 반가운 일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한국의 어디에선가 <대부>를 상영하고 있을 테지만 우리는 코폴라의 신작을 영화제에서도 개봉관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코폴라는 신작 <트윅스트>를 소수정예의 스태프들과 함께 집 근처에서 대부분의 촬영을 하는 식으로 거의 ‘학생 영화’를 찍는 감각으로 만들었다. 과거의 영광에 매달리지 않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는 스스로 원안을 만들고, 개인적인 요소를 넣고, 자기 자금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70세의 남자가 스무 살 때 만들 법한 영화를 찍는 즐거움을 만끽했다니, 우리 또한 노장의 젊은 영화와 즐겁게 만날 기회다.


글/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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