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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네바캉스 서울

[리뷰]문명의 몰락 앞에 선 인간의 모습 - 마르코 페레리의 <바이 바이 몽키>

[리뷰] 문명의 몰락 앞에 선 인간의 모습

- 마르코 페레리의 <바이 바이 몽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마지막 장면. 여자는 남자를 총으로 쏘고 남자는 죽어가며 중얼거린다. 우리의 아이. 우리의 아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남자의 입을 빌어 말한 ‘아이’는 아마도 68혁명, 그 실패 이후에 살아가야 할 세대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베르톨루치는 모든 것이 틀려버린 유럽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는 기분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바이 바이 몽키>에서 마르코 페레리 또한 비슷한 근심을 하고 있다. 어쩌면 더 과격하다. 그는 유럽 문명 자체를 근심하고 조롱한다.


유럽 문명은 애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문명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이기 위해서 문명을 필요로 했지만, 인간보다 원숭이에 더 가까운 존재다. 라파예트가 새끼 원숭이를 발견하고 기르기로 결심했을 때, 플랙스맨이 그것을 버리라고 말한 건 문명의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플랙스맨에게 원숭이란 인간이 두려워하며 제거해야 할 동물성의 흔적이다. 하지만 그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라파예트는 자신이 갖게 될 인간 아이는 거부하면서도 원숭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인다.



동물로서의 인간은 너무도 연약한 존재다. 플랙스맨의 말대로, 인간은 사라져도 쥐들은 살아남을 만큼. 쥐들이 영리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유럽 문명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시대부터 인간은 쥐와 전쟁을 벌여왔지만 승리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문명은 그 시작으로부터 단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생겨난 순간부터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어왔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을 때 희생되는 건 ‘우리의 아이’들이다. 라파예트의 아이는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쥐들에게 잡아먹힌다. 원숭이를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신분 증명 서류까지 만들었지만, 그러니까 문명 안으로 소속시켰지만, 자연 앞에서 서류 따위는 소용이 없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 수도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루이지는 신분 증명 없이 사는 자신과 같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원숭이에게 서류를 만들어 준 이유다. 자신이 하고자 한 일을 마친 뒤에 루이지는 자살한다. 나무에 목을 맨 그는 죽을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놓은 정장을 입고 입을 가려놓는다. 자연에 속한, 반드시 죽을 운명인 인간으로서 루이지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 죽은 뒤의 모습이 인간으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 서류가 아닌 이러한 행동이 그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도록 해준다. 라파예트와 플랙스맨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얼굴을 천으로 덮어서 가린다. 그 모습은 쥐들에게 뜯어 먹힌 원숭이의 시체와는 분명 다르다.



어쩌면 인간성이란 본래부터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로부터 인간을 내던져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니다. 밀랍인형 박물관은 불탄다. 오래 전 파괴된 로마처럼. 유럽 또한 같은 운명이라는 저주일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에 오는 장면은 두 사람의 모습이다. 안젤리카와 아마도 라파예트의 아이. 조롱일 수도 있고 염려일 수도 있을 이 장면 안에서 우리가 결국 보게 되는 건 인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송재상│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