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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네바캉스 서울

[리뷰]누벨바그의 잊혀진 영화 - 세르주 부르기뇽의 <시벨의 일요일>

[리뷰]누벨바그의 잊혀진 영화

- 세르주 부르기뇽의 <시벨의 일요일>




새로운 영화의 등장이란, 그것이 하나의 경향이나 집단을 형성할 때 기성의 것들을 낡은 것으로 대치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 안에서 다른 흐름을 가리기도 한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성공 또한 이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1950년대 말에 새롭게 등장한 누벨바그는 프랑스 영화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그만큼 ‘카이에 뒤 시네마’ 그룹을 제외한 동시대 프랑스 영화의 다른 경향을 간과하게 했다. 세르주 부르기뇽의 <시벨의 일요일>은 그런 명백한 사례 중의 하나다. 근 50년간 프랑스에서 잊혀진 이 영화는 2013년에 들어서 누벨바그 작품들의 50주년 기념 상영의 일환처럼 다시 소개되는 기회를 얻었다. 한국의 경우는 저간의 사정이 조금 다르긴 하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는 덕분에 이 영화는 한국 언론에 자주 회자되었고, 무엇보다 70년대 말 이래로 크리스마스 즈음에 텔레비전에서 종종 방영되었다. 모리스 자르의 영화음악 또한 라디오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물론 극장에서 온전하게 이 영화가 소개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의 일이다.


영화는 기억상실증에 빠진 파일럿 피에르와 어린 소녀 시벨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사랑이라 말했지만 요령부득한 표현으로, 둘의 감정을 적절하게 지적할 단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도차이나에서의 비행기 추락사고를 짧게 보여주는 영화의 시작부는 동양 소녀의 죽음과 피에르가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는데, 그가 기차역에서 우연히 한 소녀를 만날 때 이 이미지는 죄의식으로 반복된다. 수녀원에 방치된 소녀는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았던 것이다. 피에르는 대신 그녀를 일요일마다 방문하고, 부드럽고 순수한 둘의 만남은 곧바로 도시의 스캔들이 된다. 소녀의 이름은 시벨Cybele로, ‘아름다움’과 연결되는데, ‘나무와 흙의 여신’으로도 불린다. 둘이 고독한 영혼의 위안을 구하고 밀회를 거듭하는 날이 일요일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크리스마스날 저녁이다. 그렇다고 종교적 상징을 들이대는 것은 설명이야 편하겠지만 영화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 누벨바그의 전설적 촬영감독 앙리 드케의 촬영이 탁월한데, 특히 연못에 던져진 돌의 파문이 이는 순간이나 유리구슬을 통해 바라보는 일그러진 세계의 모습, 빛과 그림자의 흑백의 대비가 아름답다. 매혹적이지만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이 영화가 은밀하게, 때론 명증하다고도 말하는데, 페도필리아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센세이셔널리즘과 모럴을 둘러싼 문제가 오랫동안 이 영화를 쉬쉬하게 했다. 물론, 이 영화에 명증한 것이란 없다. 피에르와 시벨은 사회에서 배제되어 있고, 심리학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불안해, 서로에게 이끌렸던 것이라 말해도 틀린 게 아니다. 소녀는 너무 일찍 부모의 사랑에서 떼어졌고, 이 둘이 서로 만나는 것은 무엇보다 정서적 비탄과 사회적 고립을 피하고자 함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둘의 관계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판단 이전의 관계로 제시된다. 무엇보다 친근함. 아름다우면서도 섬세하고, 대담무쌍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이 영화의 주된 정서는 그래서 슬픔이다. <금지된 장난>처럼 이 영화는 소녀의 눈망울을 잊지 못하게 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