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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네바캉스 서울

[리뷰]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들 -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

“2014 시네바캉스 서울”의 두 번째 섹션은 “섹스는 영화다”이다. 섹션명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섹스’를 그린 영화들을 모았다. 그러나 물론 단순한 섹스는 아니다. 이 다섯 편의 영화들이 그린 섹스는 관객에게 에로틱한 감정을 전달하기보다는 놀람과 불편함을 안겨준다. 표현의 강도 면에서 당시 사회의 기준을 넘어서는 것은 물론 기존의 가치관과 규율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마치 우리에게 싸움을 거는 것 같기도 한 이 영화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한 영화가 우리 사고의 굳은 부분을 깨뜨려 줄지도 모른다.



[리뷰]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들

-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



스탠리 큐브릭은 그의 영화들이 기술적으로는 완벽한데 감정적으로는 빈약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CG가 없던 시절에 장인정신으로 완성해낸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물론 스테디캠 촬영의 가장 완벽한 사례를 보여준 <샤이닝>이나 촛불과 자연광만을 고집해 만든 <배리 린든> 같은 작품들이 그런 의견들을 뒷받침하는 예시로 이용되곤 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은 관객에게 강력한 감정적 동일시를 불러일으키려 하지 않을 뿐 실로 격렬한 감정에 관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유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이즈 와이드 셧>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금기 위반의 충동을 느끼는 인간의 감정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감정을 느끼게 하는 영화보다 감정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에 더 가까워 보이는 작품이다.


능력 있는 의사 빌(톰 크루즈)과 빼어난 외모의 앨리스(니콜 키드먼)는 권태롭지만 안정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는 중산층 부부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각기 다른 이성들로부터 유혹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격한 말다툼에 휘말린다. 빌의 일차원적인 도덕 논리에 반발심을 느낀 앨리스는 불륜의 충동에 사로잡혔던 경험을 고백하고, 때마침 급한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선 빌 역시 욕망의 흐름에 따라 한밤중의 뉴욕 거리를 떠돌다가 집단 난교 파티에 난입한다. 주최자들의 분노를 산 그는 한 여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가하는데, 자신이 체험한 일들이 아내의 꿈속에도 나타났음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다음 날, 지난밤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들에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깨닫고 후회 속에서 아내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는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이 영화가 전달하는 바는 비교적 분명하다. 우선 빌의 미스터리한 여정을 통해 이 영화는 중산층 남성의 성 도덕 체계의 붕괴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초반부의 그는 “난 당신을 사랑하고 결혼을 했고 당신을 속이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내 아내고 내 딸의 엄마고 날 배신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불륜의 가능성을 외면할 수 있는 순진한 가장이다. 하지만 ‘하룻밤의 모험’을 통과하며 그간 억눌러 왔던 욕망의 맨얼굴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가면을 벗겨내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집단 난교 파티 장면은 무의식의 세계이자 초법적 세계를 의미한다. 그 세계에 잠시나마 발을 들였던 빌은, 그러나 결국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 안전한 결말이 이 영화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더 흥미로운 건 쉽게 봉합되지 않는 앞의 이미지들인 것 같다.


가령 앨리스가 해군 장교와 섹스를 하는 장면이 반복해 나오는데, 처음엔 온전히 빌의 상상적 이미지로 보이지만 나중엔 앨리스의 환상이 생산해낸 이미지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빌이 간밤에 겪은 일도 환상인지 실재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비슷한 내용을 담은 앨리스의 꿈 역시 그녀의 환상에 관한 것인지 빌의 환상이나 실재에 관한 것인지 모호하다. 이를 환상 속으로의 도피 혹은 후퇴로 단정하고 싶진 않다. 소속이 불분명한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분명한 한 가지는 성욕, 질투, 복수심, 두려움 같은 파괴적 감정들이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들의 상호적 침투 혹은 견인을 통해 생성되고 연쇄되고 증폭된단 사실이다. 금기에 가까이 다가간 이미지들과 그것이 우리의 안온한 일상에 일으켜내는 감정적 파고의 작용 관계를 익숙하고도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다.



이후경│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