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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B영화의 위대한 거장 3인전

로저 코먼, B영화의 왕

1932년 할리우드는 동시 상영용 B급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대공황기 동안 사람들의 생활이 궁핍해지자 영화관에 오는 관객도 줄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는 클라크 게이블, 캐서린 헵번 등이 주연한 버젓한 A급 영화에 내용이 조잡한 서부영화나 공상과학영화를 덤으로 끼워 동시 상영했다. 회사의 사운을 걸고 제작되는 대작이 아니라 소시지처럼 줄줄이 엮어 파는 이 영화들은 내용도 소시지처럼 비슷했다. 당시 배우를 비롯한 모든 스태프들과 전속제 계약을 맺고 있던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영화사 간부들은 회사 직원들을 놀리지 않기 위해 스태프들을 B급 영화 제작에 투입해 악착같이 부려먹었다. 모든 메이저 스튜디오에는 B영화 제작 전담반이 생겼다. 방금 촬영을 마친 영화의 세트를 빌려다 재능 있는 작가와 배우들을 동원해 뚝딱 영화를 찍는 것이 B영화 제작 시스템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가능성 있는 신인배우와 감독들이 테스트를 받았다. 훗날 스타가 된 라나 터너와 주디 갈런드가 바로 이 코스를 거쳐 살아남았다.


B영화의 작업량은 엄청났다. 보통 5일 만에 영화 한 편을 찍어내는 방식이었다. NG를 두 번 이상 내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배우와 스태프들은 늘 준비돼 있어야 했다. B영화의 거장으로 불렸던 조셉 루이스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샌드위치 먹을 시간도 없었던’ 환경에서 B영화가 만들어졌다. 이미 흥행한 영화의 내용과 주인공 성격을 조금씩 고쳐서 다시 만들어내는 이 동시 상영용 영화들은 신인 배우와 감독들의 등용문이자 한물간 스타들의 은퇴 무대이기도 했다. 대작영화의 흥행 여부가 한 해 스튜디오 농사의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척도였다면 B영화는 고정 수입을 벌어주는 수단이었다.

이윤도 적지만 위험도 적은 B영화 제작에 메이저 이외의 군소 스튜디오도 뛰어들기 시작했다. ‘포버티 로우’나 ‘B-하이브’와 같은 소규모 영화사들이 나타났다. 대작은 만들지 않았지만 이윤을 남기는 영화사로 유명했던 B영화 제작 전문 스튜디오로 ‘리퍼블릭’과 ‘모노그램’ 등은 꽤 만만치 않은 사세를 기록했다. 범죄 멜로드라마, 서부영화, 저질 코미디, 경쾌한 코미디, 호러, 공포, 판타지영화 등 다양한 B영화는 평론가들의 경멸을 샀다. 대부분은 형편없는 시나리오에 조잡한 촬영술을 감추지 못한 영화들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보석 같은 작품도 나왔으며 발 류튼, 에드거 울머, 앙드레 드 토드 등 훗날 비평적으로 재평가 받은 감독들도 이 유형의 영화들을 통해 먹고살았다. 1948년 연방 법원에서 메이저 스튜디오가 자사의 극장 체인망을 갖고 있는 건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스튜디오 체제가 무너진 후에 텔레비전의 등장과 더불어 대도시 극장의 동시 상영 체제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B영화의 시대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로저 코먼, 쇠퇴한 B영화에 불을 지피다

그리고 로저 코먼이 나타났다. ‘얼라이드 아티스츠’와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 등의 중소 배급사를 통해 개봉했던 코먼의 영화들은 할리우드 외곽에서 경이적인 B영화의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잘난 체하지 않으며 인상적인 장면들을 곧잘 만들어냈던 코먼의 B영화들은 현대 미국영화의 또 다른 영역을 개척했다. 코먼은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어 어떻게 해서든 이익을 많이 남기는 구두쇠 제작자였으며 젊은 영화감독들을 발굴해 마구 부려먹었던 악덕 기업주이자 후원자로 이름을 남겼다. 코먼의 영화사를 거쳐 간 영화인들의 목록은 헤아릴 수가 없다. 스타가 되기 전에 코먼 밑에서 일했던 잭 니콜슨은 “코먼이 우리에게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코먼도 우리를 그렇게 싸게 부려먹은 것에 대해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적재적소에 인재들을 싸게 기용하면서 코먼은 할리우드 역사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감독이자 제작자가 됐다. 그는 5할에 가까운 흥행 성공률을 보였으며 손해를 본 영화는 거의 없었다. 대단한 영화 도박사였다.

1947년에 스탠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산업에 뛰어든 코먼은 스토리 분석가,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으며 첫 번째 시나리오인 <하이웨이 드라그넷>(1954)을 영화사 측에서 수정하자 자기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1954년에 연출 활동을 시작한 코먼의 영화들은 괴상한 등장인물과 사회적 논평을 담은 틀에 박히지 않는 플롯과 특수 효과를 영악하게 이용하는 세트와 비인습적인 촬영의 매력이 돋보였다. 코먼의 영화는 고전기 할리우드의 B영화 제작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10만 달러가 제작비의 상한선인 저예산영화를 고집했고 촬영 기간은 5일에서 10일을 넘어서는 법이 없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로저 코먼이 제작자나 연출자로 크레딧에 등장한 <머신 건 켈리>(1958), <와일드 엔젤스>(1966) 등의 영화는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테러 이야기>(1962), <라벤>(1963), <붉은 죽음의 마스크>(1964) 등의 초저예산 공포영화는 심지어 오늘날 이 장르의 고전으로 대접받는다.

로저 코먼은 영화 제작 규칙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빠른 리듬으로 구성된 서부영화와 공상과학영화와 소프트 포르노와 10대를 위한 장르 재탕 영화를 '드라이브 인 극장용'으로 재빨리 제작해 팔아 치웠다. 그의 연출은 거침이 없었고 부끄러운 줄 몰랐다. 형체만 갖춘 엉터리 세트, 가슴을 드러낸 여성, 대담한 폭력과 조잡한 특수 효과는 젊은이들에게 낄낄거리며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주었다. 코먼식 영화 제작의 규칙은 ‘무엇이든 가능하며 예산 초과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코먼 밑에서 일했던 마틴 스콜세지는 대공황기의 폭력을 묘사한 영화 <벅스카 버사>(1972)를 찍을 때 코먼에게 이런 충고를 들었다. “기억하게 마티. 뭘 찍어도 좋아. 그러나 10만 달러의 예산을 초과하면 안 돼. 그리고 시나리오 15쪽마다 나체가 나와야 돼. 그 두 가지 조건만 지키면 얼마든지 자네 마음대로 찍어도 좋아”

코먼은 제작비 지출에 인색했지만 감독의 창조성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작진의 독창적인 생각을 장려했다. 코먼 영화 학교의 교훈은 ‘원하는 대로 찍어라’는 것이었다. 코먼은 다른 영화에서 아이디어를 훔치고 바꾸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코먼의 영화사에서 일했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코먼의 요구로 옛 소련 공상과학영화 필름을 가져다가 영어 더빙을 넣고 다시 편집하는 일을 했다. 그는 원작의 시나리오도 없이 순전히 화면만 보고 다시 시나리오를 써서 영어 더빙을 마쳤다. 역시 코먼이 운영하는 영화사에서 연출 데뷔작을 찍은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코먼의 예전 영화에서 편집으로 잘려 나간 보리스 카를로프가 나오는 40여 분 분량의 필름을 기초로 3일 동안 카를로프를 출연시켜 보충 촬영을 한 다음 <표적>(1968)이란 제목을 붙여 새 영화로 개봉시키는 희한한 일을 경험했다. 보리스 카를로프의 과거 이미지와 현재 이미지가 교차하는 이 영화를 두고 평론가들은 실험적인 시도라며 절찬했다. 정작 보그다노비치 감독 자신의 소감은 ‘그렇게 하고 나니 영화 박사가 된 기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었다.

온갖 신기록에 도전한 구두쇠 제작자

코먼의 구두쇠 제작 방식은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섹스, 폭력, 사회적 문제 등 젊은 세대가 관심을 끌 만한 요소들을 끌어안으면서도, 여하튼 영화를 싸게 찍었다. 자신이 얼마나 영화를 빨리 찍을 수 있는지를 증명하려고 하루 반 만에 영화를 완성한 적도 있었다. 전에 찍어둔 다른 영화의 필름을 얼기설기 섞어 새로 찍은 필름과 합쳐 날림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코먼의 친구는 ‘영화는 육상 경주가 아니다’는 말로 코먼을 질책했다. 코먼은 굴하지 않았다. 싸구려 SF영화를 찍을 때 100만 개의 눈을 가진 괴물이 등장하는 장면을 위해 코먼은 주전자에 100개의 구멍을 뚫어 배우의 머리에 씌우고 작업했다. <공포>(1963)를 찍을 때는 계약 기간에 따라 하루 이틀 시간이 남은 감독과 배우들을 번갈아 데리고 계속 시나리오를 바꿔가며 촬영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며칠 연출하고 떠나면 몬티 헬먼이 와서 연출하고 떠나는 식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주연을 맡은 잭 니콜슨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니콜슨 자신도 연출을 하겠다고 코먼에게 졸랐다. 코먼의 반응은 간단했다. “그럼 자네가 해. 단, 말은 되게 해”

싸게, 융통성 있게 찍는다고 해서 코먼의 영화가 엉터리인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초반의 미국에선 유럽 예술영화가 유행이었다.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나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들이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코먼이 그 시절에 만든 <어셔가의 몰락>(1960)과 같은 영화는 조명과 촬영이 유럽풍으로 꽤 수준급이었다. 마틴 스콜세지는 <어셔가의 몰락>이 그 시절 희귀한 미국 예술영화 중 한 편이라고 기억했다. 경험이 부족한 신인들을 과감하게 기용했던 코먼은 자신의 영화에 그들의 젊고 실험적인 기운이 스며들기를 원했다.

1966년은 그런 코먼의 영화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었다. <어셔가의 몰락> 이래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짭짤한 재미를 본 코먼은 새로운 소재를 찾고 있었다. 그는 오토바이 폭주족 ‘헬스 엔젤스’가 주인공인 영화 <와일드 엔젤스>를 구상했다. 주류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이 저주받은 시민들의 관점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아이디어였다. <와일드 엔젤스>는 미국 영화 역사에서 전에 없던 영화였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가 뉴할리우드의 도래를 부추겼던 해에 코먼은 비주류 저예산 영화에서 새로운 영화 스타일과 내용을 전시하고 있었다. 느슨한 플롯에 날카로운 점프 커트로 이어지는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선 ‘헬스 엔젤스’ 사람들이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목사를 구타한다. 폭력의 에너지가 과도하게 넘쳐나며 기성세대의 질서를 야유하는 이 장면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코먼은 배우들에게 그저 느끼는 대로 연기하라고 주문했고 배우들은 아무런 통제 없이 자신들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발산했다. 꽉 짜인 장르 영화의 표현 규범에 익숙한 관객에게 그 장면은 근사한 도발로 보였다. 그것은 이후 십 수 년간 할리우드에 몰아쳤던 뉴할리우드 영화의 스타일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코먼의 영화에는 점점 아웃사이더의 정서가 짙게 배어났으며 코먼은 주류 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들만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낙오자들에게 공감을 느꼈다. 코먼은 마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트립>(1967)을 찍으면서 그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체험‘을 했다. 그는 한때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마약을 탐닉했으며, 영화에도 1960년대의 히피 정서가 강하게 묻어났다. 싸구려 영화 제작자이자 흥행사였던 코먼은 어느새 장 뤽 고다르와 함께 반전운동이 한창인 대학캠퍼스에서 강연하는 청년 문화의 대변자가 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코먼은 시대의 유행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대의 기운을 흡수한 창의적인 제작자

1970년대 초반 이후 코먼은 마약을 끊고 제작과 배급에 전념했다. 코먼은 그때 지쳐 있었다. 서서히 연출에서 손을 떼는 대신 제작과 배급에 전념했다. 코먼은 여전히 일 년에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지만 어떤 영화도 그가 직접 연출한 영화만큼 좋지는 않았다. 1970년대 초반 이후 그는 연출에서 멀어졌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색깔과는 달리 아웃사이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성공한 영화 사업가였다. 현실에서 아웃사이더가 아닌 그는 1960년대의 대항문화의 대변자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더욱 사업이 번창하는 아이러니를 겪었다. 코먼은 훗날 뉴할리우드 영화 세대의 일원이 됐던 수많은 감독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자연스레 1960년대의 청년 문화의 기운을 수혈 받는 덤을 누린 것이다. 코먼은 회의가 들었다. 그는 ‘게임에서 이겼으면 운동장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0년에 코먼은 뉴월드픽처스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곳에서 그는 <데스 레이스 2000>(1975)과 같은 재탕 영화를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잉마르 베리만, 프랑수아 트뤼포, 페데리코 펠리니의 유럽 예술영화를 배급했다. 코먼이 <아델 H의 사랑 이야기>(1975) 등의 유럽 예술영화를 수입해 배급하는 일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자 예술영화도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할리우드 메이저가 너도 나도 유럽영화 배급에 뛰어들어 천문학적인 마케팅 공세를 퍼붓자 코먼은 그 일에서도 손을 뗐다. 메이저가 끼어든 예술영화 수입 배급 시장은 곧 파탄을 맞았고 미국에서 유럽영화를 보는 일은 과거지사가 됐다. 1983년에 코먼은 미국에서 가장 큰 독립영화 제작사가 된 뉴월드픽처스를 1천6백50만 달러에 팔고 콩코드/ 뉴 호라이즌스를 설립해 매년 20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했다. 상업적으로 승승장구한 그가 1987년에 올린 수익은 9천4백만 달러였다. 드라이브 인 극장이 쇠퇴하자 코먼은 비디오, 유선 텔레비전을 무대로 알찬 수입을 거두는 싸구려 영화를 제작했다.


연출에서 손을 뗀 코먼은 안전한 인사이더의 여유를 누렸다. 아내와 가족을 꾸리고 안정된 제작자의 지위를 누렸다. 마침 그 때는 뉴할리우드의 전성기가 지나고 <죠스>(1975) <스타워즈>(1977) 등의 블록버스터 시대가 열릴 참이었다. 코먼은 다시 그들 영화와 경쟁했다. <죠스>가 개봉하자 <피라나>(1978)를 만들고 <쥬라기 공원>(1993)이 성공하면 <카르노사우라>(1993)를 만드는 식이었다. 그것은 코먼의 전매특허처럼 된 제작 방식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현대 블록버스터는 1950년대에 코먼이 만들었던 저예산 B급 싸구려 장르영화에 영향을 받았다. 스필버그와 루카스는 할리우드 고전과 유럽영화로부터 받은 영향 못지않게 사춘기 시절에 본 싸구려 장르영화에서 감성을 키운 세대였다. 마틴 스콜세지, 피터 보그다노비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를 비롯해 존 세일즈, 제임스 카메론, 로버트 타운, 로버트 드 니로, 데니스 호퍼, 찰스 브론슨 등의 코먼 영화 학교의 수제자들은 코먼을 떠나서 할리우드의 새로운 유행을 창조했고 코먼은 다시 그들을 모방했다.

한 푼도 잃지 않은 제작자

로저 코먼이 B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던 1950년대는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가 왔던 시기였다. 풍요로운 아이젠하워 시대에 드라이브 인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여흥을 즐기던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코먼은 텔레비전에서 볼 수 없는 섹스와 폭력을 끼워 넣어 화제를 끄는 영화를 만들었다. 1950년대에는 가수 프랭키 아발론이 나오는 <비치 파티> 시리즈가 유행했지만 1960년대에는 주로 공포영화와 갱영화, 액션영화 장르에서 파격적인 B영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영화들을 곧잘 찍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반항적인 히피주의 정서를 끌어안은 영화들을 내놓았다.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는 이런 B영화 흐름의 절정은 <이지 라이더>(1969)가 장식했다. 로저 코먼의 <와일드 엔젤스>에서 주연을 맡았던 피터 폰다는 비슷한 소재의 <이지 라이더>에서 제작, 주연을 맡고 역시 B영화 배우인 데니스 호퍼에게 감독을 맡겼다. 37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이 영화는 누가 봐도 B영화였다. 그러나 이 영화를 배급한 콜럼비아는 6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마약이나 폭력 등 금기시된 주제를 공공연히 다루던 B영화의 흐름이 주류 할리우드영화와 접맥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B영화와 주류 영화의 교배는 1970년대에 한발 더 나아간다. 조지 루카스는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미국의 스크린을 장식한 <플래시 고든> 유의 B급 공상과학영화와 로저 코먼의 <별들 너머의 전쟁>(1980)에서 영감을 얻어 <스타워즈>를 만들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출세작인 <죠스>도 1950년대의 B급 공포영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 중심에 로저 코먼이 있었다. 그는 유행이 돌고 도는 사이클에서 늘 안전 궤도를 타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코먼의 전설적인 성공의 원인은 간단했다. 할리우드의 구속을 벗어난 곳에서 그는 자기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트레이시 로드와 같은 포르노 스타를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화려하고 비싼 세트를 쓰지 않는 대신 값싸게 마음대로 찍는 영화의 즐거움을 추구했다. 때로 그런 코먼의 스타일은 경이적인 성취를 거두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의 초기 대표작인 <공포의 구멍가게>(1960)는 ‘사람들이 액션 페인팅을 하고 달리는 듯한 느낌’의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코먼은 가장 인습적인 영화를 제작하면서 가장 비인습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모순된 제작자이자 감독이었다. 25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했고 50여 편의 영화를 연출한 코먼의 영화는 액션, 유머, 쾌감을 가리키는 것이 됐다. 그 대가로 그는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쓰는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조나단 드미의 말대로 ‘위대한 독립영화 작가’였다.

글/
김영진 (영화평론가,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