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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B영화의 위대한 거장 3인전

전환기의 B영화와 리처드 플레이셔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B영화의 위대한 거장 3인전’이라는 주제로 리처드 플레이셔와 로저 코먼, 테렌스 피셔의 영화 18편을 4월 한 달 동안 상영한다. 이들은 B영화를 언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감독들이지만 국내에는 소개되는 기회가 적어 여전히 미지의 작가들로 남아있다. 리처드 플레이셔, 로저 코먼, 테렌스 피셔 각자의 장문의 특집을 준비한 건 이런 연유에서다. B영화는 어떻게 탄생해 전성기를 누렸고 지금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지가 B영화의 특집에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B영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어정리가 필요하다. ‘B Pictures’를 번역한 ‘B급 영화’라는 표현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급’이라는 부정적인 표현 때문에 사람들은 B영화를 A, B, C 등의 위계에 따른 저급한 영화, 혹은 이류 감독이 안이한 발상으로 만든 저질의 영화라 간주한다. 하지만 별난 감성의 예외적인 감독이 만든 괴상한 영화가 B영화라는 것은 편견에 가깝다. B영화를 특별한 개인들에 귀착시키는 것 또한 동일한 우를 범할 수 있다. 이런 논의들이 B영화의 역사성과 익명성을 손쉽게 가려버린다.

B영화는 태생적으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역사, 그것의 부침과 함께 했던 영화들이었다. 특수한 일면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개인의 취향에서 비롯된 결과 또한 아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고 산업의 문제였다. 할리우드의 밝은 조명 뒤편에는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고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밝고 호화로운 영화들만을 제조했던 것도 아니다. 반대의 극에서 빈곤의 문제가 동전의 양면처럼 있었다. B영화는 말하자면 할리우드라는 제국주의 내부의 거대한 식민지였다. 할리우드의 화려함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했던 구조적인 빈곤에서 B영화가 탄생했던 것이다.

구조화된 빈곤과 어둠의 미학은 193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화려한 할리우드에 이질적인 어둠을 선사한 유니버설 호러의 역사가 있다. 괴물들을 끌어오고 공포를 조장한 이는 로베르토 플로레리였다. 그는 무르나우와 프리츠 랑의 카메라맨이었던 칼 프로인트를 끌어들여 유니버설을 어두운 영화의 산실로 만들었다. RKO의 발 류튼 또한 어둠과 공포, 빈곤, 염가의 영화를 미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1930년대 초에 B영화가 양산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조건은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구조적인 개편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말에 유성영화가 도래하면서 20세기 폭스사는 유성영화 촬영소를 신축했고 구래의 촬영소를 폐기하는 대신에 B부서를 만들었다. 주로 저예산 영화를 만들기 위한 부서였다. 폭스를 위시해 MGM, 파라마운트, RKO에 B영화의 담당부서들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기획자들이 이곳에 배치되었다. 이들이 B영화의 전담 프로듀서들이었다. 메이저 스튜디오의 바깥에도 B영화를 만들어낼 독립 제작사들이 있었다. 이른바 '빈곤지대poverty row'라 불리던 곳에 염가의 영화를 제작할 리버플릭(1935), 모노그램(1931), PRC(Producers Releasing Coporation, 1939) 등의 영화사들이 있었다.

B영화의 현실화는 그런 점에서 1930년대, 불황시대의 유효수요 부족으로 관객동원의 감소를 막기 위해 할리우드가 동시상영용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이다. B영화는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극장이 두 편의 영화를 한 편의 가격에 제공할 필요로 고안되었다. 동시상영용 B영화는 가능한 빨리 찍고(quickies), 싸게 찍는(cheapies) 영화들이어야만 했다. 모든 메이저 영화사가 B부서를 개장했고, 배급업자의 주문에 따라 값싸고 빨리 찍는 저렴한 영화들이 양산됐다. 화려한 할리우드가 위기에 처하면서 '빈곤지대' 또한 활력을 찾았다. 실제로 193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75%가 B영화들이었고 대략 4천편의 영화가 이 시기에 나왔다.

B영화의 전성시대

B영화들 대부분은 100,000만 불미만의 제작비에 2-3주 이내의 촬영으로 만들어졌다. 폭스사의 경우 B부서에서 1년에 24편의 B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메이저 스튜디오의 B영화 전담 프로듀서뿐만 아니라 ‘빈곤지대’의 독립영화사들이 끊임없이 B영화를 찍어냈고, 이들 영화는 메이저 영화사의 배급라인을 통해 모든 극장에 유통, 배급되었다. 가히 B영화의 전성기였다. 제작만 된다면 모든 B영화들이 당당하게 A영화와 함께 상영될 기회를 얻었다. 부율제로 배급된 A영화와 달리 B영화는 단매로 극장에 배급됐기에, 매매가격 대비 제작비용만 적절하게 맞출 수 있다면 B영화는 언제나 안정적인 수입을 거둘 수 있는 할리우드의 효자종목이었다. 그리하여 전설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염가 영화를 미학의 경지로 이끈 에드가 울머! 그는 유니버설에서 벨라 루고시와 카를로프를 주연으로 <검은 고양이>(1934)를 만들었는데, 단 96,000달러의 예산으로 19일 만에 완성해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의 전설은 유니버설을 떠나 그가 할리우드 사상 가장 가난한 영화사인 PRC에서 다량의 B영화를 제작하면서였다. 그의 최고작 중의 하나인 <우회>(1945)는 65분의 러닝타임에 제작비 2만 불, 촬영기간 5일으로 전무후무한 B 필름 누아르의 전설이 됐다.

당시의 B영화는 작가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저렴한 영화들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창의력과 간결함, 엄격한 것과 하찮은 것의 혼합으로 영화를 생산했는가를 경이롭게 보여준다. 거대 스튜디오의 B부서와 독립영화사는 신속하게 저렴한 영화를 생산하면서, 심지어 말 한 마리로 악당과 영웅이 말을 번갈아 타며 추적을 벌이는 웨스턴을 촬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남이 촬영하던 세트를 철거하기 전에 몇 시간의 도둑촬영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수일이 걸릴 장면을 단 몇 시간에 롱테이크로 끝내버리는 기적적인 성공을 보여준 작품들이 B영화였다. 뉴딜부터 2차대전기에 걸친 10년간은 할리우드의 황금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B영화의 마지막 활황기였다. 대략 3백 50명 정도의 B영화감독들이 있었고, 그 대부분은 지금은 이름도, 제목도 알 수 없는 감독들, 영화들로 남아 있다. 이런 거대한 익명성이야말로 B영화의 특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194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B영화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A와 B의 구분 또한 흐릿해진다. 모노그램, 리퍼블릭은 1950년대에는 A급 영화의 제작을 단행했고 B영화들 또한 이전의 동시상영용 영화로 안정적인 배급망을 통해 유통될 수 없었다. 이런 애매함은 할리우드가 독점금지법에 따라 조금씩 붕괴하고, 텔레비전에 관객들을 빼앗기고, 컬러영화를 단행하면서 빠른 촬영의 저예산 영화를 만들 여유가 없어지면서 확대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전후의 할리우드에서 새롭게 데뷔한 감독들은 A영화와 B영화의 경계가 소멸된 지점에서 새롭게 영화작업을 시작해야만 했다. 조셉 로지는 RKO에서 <녹색 머리의 소년>(1948)으로 데뷔했고, 니콜라스 레이 또한 <그들은 밤에 산다>(1948)로 첫 영화를 만들었다. 비록 이러한 영화들은 A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의미의 B영화라 부르기도 망설여진다. 실제로 1948년 이래, 촬영소 축소에 따라 B영화 제작에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은 텔레비전으로 이동했고, 텔레비전용 B영화라 부를법한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다. 촬영소 부지의 매각에 따라 할리우드의 B부서 또한 사라졌고, 남겨진 것은 속칭 ‘2류 영화’들로 이전의 B영화들은 통속적인 상업영화와 혼용되어 불려졌다. 촬영기간의 제한, 저예산, 짧은 러닝타임의 단순함의 미덕은 사라지고 동시상영용 영화의 전국적인 안정적 배급망 또한 붕괴하면서 B영화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위기와 더불어 시련을 겪었다. 할리우드의 파산과 경매라는 가혹한 조건에서 새롭게 영화를 만들어야만 했던 현대적인 작가들이 이 시기에 등장한다. 이른바 전환기의 시기에 넓은 의미의 B영화를 계승한 이들은 단연 조셉 루이스, 로버트 알드리치, 사무엘 풀러, 리처드 플레이셔와 같은 이들이었다.

B영화를 계승한 장인

리처드 플레이셔는 이들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덜 알려진 감독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영화가 유명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커크 더글러스가 주연한 <바이킹>(1958)이나 조 단테가 리메이크를 해서 유명해진 <마이크로 결사대>(1966), 쥘 베른의 고전 과학소설을 영화화한 <해저 2만리>(1954),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원래 연출을 하기로 했던 <도라! 도라! 도라!>(1970), 그리고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출연한 <레드 소냐>(1985)와 같은 후기의 작품들은 상업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B영화의 작가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작품은 기억하지만 리처드 플레이셔라는 작가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는 대단히 모호한 작가로 남았다. 비평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은 적 또한 없다. 비평가들이 그의 작품을 간과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전속되어 장르를 넘나드는 지극히 범용해 보이는 작품들을 양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47년에서 1951년까지 그는 RKO에서 9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이어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초까지는 폭스사에서 12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범죄영화, 서부극, SF, 모험영화, 성서영화 등 그가 손을 대지 않은 장르는 없었고(거의 대부분은 영화사가 그에게 의뢰했던 결과이다), 그리하여 그의 작가적 개성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시대적으로 보자면 다채로운 장르를 섭렵한 로버트 와이즈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탁월한 대중영화를 만든 것도 아니다. 리처드 플레이셔의 독특함은 언제나 장인처럼 주어진 영화들을 만들면서 모든 영화들에서 혁신적인 기술과 발명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영화들은 플레이셔의 영화들 중에서 B필름 누아르에서 연원한 범죄에의 세심한 탐구(<난폭한 토요일>(1955), <강박충동>(1959), <보스턴 교살자>(1968), <릴링턴가의 살인>(1971), <라스트 런>(1971), <두목은 죽었다>(1973)), 시대극의 재건축(<바이킹>), SF적 상상력의 현실화(<소일렌트 그린>(1973))로 유명한 작품들이다. 이들 영화들에서는 프리츠 랑, 스탠리 큐브릭, 오토 프레민저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냉혹한 스타일이 느껴진다. 플레이셔의 영화는 교훈적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냉담하고, 문명화에서의 질병에 대한 무자비한 진단과 고독한 인간의 삶, 혹은 사회적 부적응을 보이는 인물들의 병리학적 행위들에 주목한다. 그런 점에서 그를 돋보이게 한 영화들은 범죄영화들이다. 가령 <강박충동>에서는 사회적 도덕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자본가 계급의 두 학생이 니체 이론에 매혹을 느껴 자신들의 우월함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소년을 살해하고 경찰과 게임을 벌인다. 반면, <릴링턴가의 살인>에서는 전쟁을 치른 고독한 노년의 남자가 어떻게 끔찍한 살인을 거듭하는가를 보여주는데, 고립된 장소에서의 압박감이 느껴지는 카메라의 배치, 임상실험에 가까운 인물의 행태를 담아내는 무서운 시각으로 놀라움을 선사한다. 플레이셔의 영화는 범용한 장면 하나하나가 더해지면서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밀도와 강렬한 텐션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경이로움에 빠져들게 한다. 그것은 때로는 <강박충동>에서처럼 살인이라는 액션의 주요사건이 결코 보이지 않으면서도 화면에 운동의 소용돌이를 휘몰아치게 방식이다. 액션을 대신하는 법정드라마의 형식이 이 감독에게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험적인 정신과 스타일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아무래도 <보스턴 교살자>일 것이다. 이 영화는 상이한 시선과 응시로 구축된 작품으로, 전반부가 연쇄살인범을 잡으려하는 경찰의 탐색이 다큐멘터리 터치로 그려져 있다면 후반부는 살인마의 도덕적 딜레마와 심리학적 질문이 주관적인 상상과 결합되어 있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신적이라 할 만한 분할화면의 도입은 동시대 로버트 알드리치나 1970년대 이래 브라이언 드 팔머의 전매특허라 여겼던 활용을 앞서는 것이다. 플레이셔는 이 영화에서 살인마로 분한 토니 커티스의 연기 지도에 비디오를 활용했고 라스트의 백색의 방을 구현하기 위해 벽을 발광시켰다고 한다. 플레이셔의 탁월함은 물론 이런 이야기나 소재의 능수능란한 연출이나 기술적 혁신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인물들(그들이 비록 살인자나 악인일지라도)에 감정의 깊이를 부여한 감독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작품들에서 인물들도 훌륭하지만, 특히나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젊은이들이 맹위를 떨치던 시대에 <라스트 런>이나 <두목은 죽었다>에서 그가 보여준 늙음을 의식한 인물들, 인생의 만년을 맞이하는 사내들의 모습은 깊은 울림을 준다.

엄밀한 의미에서 리처드 플레이셔는 전형적인 B영화감독은 아니다. 1950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B영화의 대표주자는 고전적인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이질성의 미학을 선보인 조셉 루이스였다. 플레이셔는 그러나 B영화의 소멸기에 영화를 시작해(그것도 디즈니에서의 <해저 2만리>라는 A급 영화가 그를 세상에 작가로서 알린 첫 성공작이었다), B영화를 계승한 장인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B영화의 소멸의 시기에 그 조건이 없어진 상황을 두고 B영화를 재검토한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A와 B의 구별이 무의미해진 시기에 B영화의 시스템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시도를 벌였다. 소재와 장르를 불문하고 다층적인 의미와 깊이를 담아내는 탁월한 화면의 구성, 제한된 조건에서의 기술적 혁신들은 B영화의 미덕이었다. 리처드 플레이셔의 영화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그의 영화를 새롭게 보는 것은 특정한 조건에서 나온 B영화에의 긍정의 시도이다. 아직 제 위치를 부여받지 못한 리처드 플레이셔의 영화는 여전히 발견 중에 있다.

글/
김성욱(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